챗GPT 상용화 1년이 지난 지금, 급속도로 진전하는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챗GPT를 발표한지 단 몇 주 후,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챗GPT의 아버지’라 불리는 샘 알트만이 오픈AI에서 쫓겨나고 마이크로소프트에 합류하기로 하는 등 단 며칠 동안의 미국 실리콘밸리의 드라마는 덤이다. 어쨌든 기술의 급격한 변화만 두고 보자면, 인공지능은 효율성과 혁신을 위한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동시에 디지털 혁명이 인간의 직업을 대체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더욱더 증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클릭 한 번의 속도로 진보가 일어나는 시대에, 혁신을 거부하며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머무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가령 기술은 앞서가는 데 여전히 대학에는 20세기 방식으로 교육을 운영하고자 하는 경향이 보인다. 최근 업데이트된 챗GPT 기술로 ‘나만의’ 맞춤형 챗GPT를 만들어서, 외국어 학습을 위해 활용할 수 있지만, 여전히 외국인 강사가 없으면 외국어 학습이 안된다는 주장을 하거나, 챗GPT가 300페이지 짜리 책 요약 및 글쓰기까지 도와주는 이 마당에 학생들이 챗GPT 활용 결과를 그대로 베껴서 과제를 제출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오히려 과거의 ‘객관식 시험’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교육자도 없지 않다.
여러 가지로 교육계에 위기가 도래한 것은 맞으나, 이에 대응해 새로운 교육 방식을 고안하기보다는 그저 ‘예전에 했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 보다는 ‘내 밥그릇’에 더 쏠려 있는 관심 때문일 것이다. 입으로는 디지털을 말하면서, AI 활용이 인간의 노동과 그 노동을 통제하는 권력까지 앗아갈까 두려워 과거의 방식에 머무는 것이다.
쥘 베른이 쓴 1865년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는 이제 막 증기기관이 생겨날 즈음에, 로켓을 달까지 발사하는 것을 상상했던 소설이다. 흥미롭게도 쥘 베른의 소설에서는 실내에서 가스등이 조명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묘사가 된다. 당시 사용된 조명 기술은 소설의 19세기 중후반 설정과 일치한다. 가스 조명은 이 때 집, 거리, 그리고 사업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전기가 상용화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즉, 당시에는 전기라는 것이 상상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 속에 로켓과 가스 조명이라는 도저히 공존하리라 보기 어려운 두 가지 기술이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쥘 베른의 소설의 경우에는 단지 시대적 한계 탓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활용 가능한 기술이 주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싫은 인간의 욕망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것 같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의 한 연설에서 ‘우리가 달에 가야 하는 이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을 굳이 가려 했기 때문에 1969년에 달에 발을 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달이 한때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듯이,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내일의 혁신의 가능성 또한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AI와 함께, AI를 넘어서, AI에 저항해,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급속도로 진보하고 변화하는 기술 때문에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누구도 어떻게 공존하고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것의 이점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명백하다. 생명을 구하는 의학적 돌파구에서부터 실시간 의사소통의 편리함에 이르기까지. AI를 활용해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그 결과물을 검증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교육자의 할 일이라면, 달을 향해 쏘는 로켓을 만들어야 할 강의실에서 가스 조명을 쓰자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칼럼은 2023년 11월 22일 경상일보“[최진숙의 문화모퉁이(7)]상상하는 것은 무엇이든”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