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표면 위에서 자라난 그래핀은 깔끔하게 분리해야 소재로 쓸 수 있다. 그래핀 연구자들이 투명 테이프로 흑연에서 그래핀만 살짝 떼낸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그런데 굳이 투명 테이프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구리와 그래핀을 분리할 수 있다. 구리 표면에 그래핀이 붙은 습도가 높은 공기 속에 놓아두면 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떨어져 있는 얇은 그래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핀을 합성하는 연구실에서 종종 목격되던 이 장면에 숨은 원리를 UNIST 연구진이 찾아냈다.
곽상규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팀과 로드니 루오프(Rodney S. Ruoff) 자연과학부 교수팀은 구리(111)에서 코팅된 그래핀이 얇은 한 겹으로 벗겨지는 현상을 양자역학 계산으로 밝혀냈다.
연구진은 구리 표면에서 자란 그래핀의 가장자리에서 조그맣게 잘라낸 ‘그래핀 나노리본’을 모델링해 슈퍼컴퓨터로 분석했다. 그 결과 공기 중의 물과 산소가 산화 화학반응을 일으켜 구리 표면에서 그래핀을 떼어낼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
그래핀 나노리본의 가장자리는 산소 흡착에 크게 영향을 준다. 이는 구리와 만나는 경계에서는 산소 결합을 약화시킨다. 또 구리 위에 있는 물은 불안정해서 분리돼 떨어진다. 그러나 나노리본의 가장자리는 구리 표면의 산화 상태와 관계없이 물의 안정화를 촉진한다.
두 현상의 영향으로, 그래핀 나노리본의 가장자리는 초기 표면 산화상태에 영향을 준다. 결국 산소와 물이 구리와 그래핀 사이에 들어가게 돼 그래핀 나노리본이 구리 표면에서 쉽게 분리될 수 있다.
▲그래핀 나노리본이 구리(111) 표면에서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모습. 그래핀 나노리본의 가장자리에 산소가 흡착되면서, 구리 표면의 산소 결합은 약해진다. 이와 더불어 구리(111) 위에 있던 물 분자는 불안정해서 분리되는데, 그래핀 나노리본에서 안정화된다. 두 가지 작용으로 그래핀 나노리본은 구리(111) 표면에서 쉽게 분리되는 것이다.
곽상규-루오프 교수팀은 이런 가능성을 양자역학 계산을 통해 최초로 규명했다. 연구 결과는 화학 분야 최고 권위지인 미국화학회지(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 JACS) 8월 4일자에 소개됐다.
이번 연구를 담당한 케스터 왕(Kester Wong) 박사는 “물과 구리 표면의 산소 라디칼(radical, 짝 없는 전자를 가진 원자)과 이를 중재하는 그래핀 나노리본과의 상호작용 정보를 통해 표면 산화물 형성에 관계한 물과 산소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밝혔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전체적으로 주도한 곽상규 교수는 “그래핀의 쉬운 박리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주목한 이번 연구는 앞으로 위치 선택성 그래핀 기반 촉매 개발과 관련해 도움이 될 것”이라며 “특히 고체 표면들과 저차원 물질과의 각기 다른 경계면 연구를 지속해 흥미로운 결과들을 계속 추적 중이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실험이 아닌 계산화학 분야의 연구결과가 JACS에 실리는 건 드문 사례”라며 “그래핀 나노리본의 모델링이 적중했고, 그 결과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기초과학연구원(IBS) 다차원탄소재료연구단(CMCM)과 미래창조과학부의 기초과학연구 프로그램(ERC)의 지원으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