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의 3진법 소자 분야 연구 역량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과학동아 1월호 기획기사 주제인 3진법 소자 분야의 전문가로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의 김경록 교수와 강석형 교수가 소개된 것이다.
김 교수는 기존 2진법 소자 구조 및 공정을 활용해 3진법 소자를 구현하는 기술을, 강 교수는 3진법 이상 논리 상태 구현하는 ‘다치논리회로’ 에 관해 의견을 제시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과학동아 기사 ‘ 3진법 소자, 하드웨어 인공지능을 꿈꾼다’ 를 통해 확인가능하다.
0과 1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숫자다.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담은 숫자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는 전류가 흐르는 것을 1로, 차단된 것을 0으로 환산한 2진법 시스템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이처럼 ‘On’과 ‘Off’를 1과 0에 대응시키는 방식은 굉장히 명쾌하지만 최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계를 하나 더 추가해서 3진법 신호를 구현한다면 더 효율적인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 예컨대 10진수 128을 2진법으로 나타내려면 8자리가 필요하다. 하지만3진법으로 나타내면 5자리(62.5%)면 충분하다.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줄어 계산 속도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전력 소모량도 절약된다.
그런 까닭에 1940~1950년대 컴퓨터과학자들은 2진법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3진법 컴퓨터에도 눈을 돌렸다.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의 컴퓨터과학자 니콜라이 브루센트소프와 수학자 세르게이 소볼레프는 1958년 ‘세툰(setun)’이라는 3진법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세툰은 -1과 0, 그리고 1을 신호로 사용하는 컴퓨터였다. 진공관에 음(-)의 전압을 걸어주는 방식으로 ‘-1’ 신호 상태를 구현했다. 2진법 컴퓨터에서 정보를 2진수로 변환해 표현하는 기본 단위를 비트(bit)라고 하는데, 3진법 컴퓨터에서 비트에 대응하는 단위는 트리트(Trit·Ternary Digit)다. 세툰은 18트리트의 숫자(최고 3억8742만489)까지 다룰 수 있었다.
2진법 컴퓨터에서는 29비트로 다룰 수 있는 숫자다. 또, 같은 성능의 2진법 컴퓨터에 비해 제작 비용도 2.5배나 저렴해 당시 전세계에서 개발된 컴퓨터 중에서는 가장 경제적이었다. 세툰의 가장 큰 장점은 당시 개발된 2진법 컴퓨터에 비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쉽고, 활용 분야가 폭넓다는 점이었다. 공학 계산과 실험 결과 처리, 제조 공정 관리, 컴퓨터 교육 등 다방면에 쓸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3진법 컴퓨터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세툰을 주문하는 등 수요가 많았지만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고, 1958년부터 1965년까지 50대를 생산하는 데 그쳤다. 1970년에는 성능을 개선한 세툰70을 개발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3진법 컴퓨터의 쇠락, 그리고 부활
3진법 컴퓨터에 대한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상용 컴퓨터의 주도권은 2진법 컴퓨터로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반도체와 트랜지스터, 집적회로(IC)가 개발되면서 2진법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미국의 IBM을 중심으로 전세계에서 2진법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산업을 주도하는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반도체와 집적회로 등의 생산 공정도 2진법을 구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탄탄하게 구축됐다. 2진법 컴퓨터가 가진 단점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소자 발전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3진법 컴퓨터의 효율성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3진법 컴퓨터에 대한 연구는 학술적인 차원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3진법 컴퓨터는 20세기 후반부터 재조명받고 있다. 2진법 컴퓨터의 핵심 재료인 반도체 집적회로를 더 이상 작게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집적회로는 작은 크기의 회로로 많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점점 밀도를 높여 왔지만, 물리적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회로의 선폭을 나노미터(nm, 10억 분의 1m) 수준으로 좁힌 상황이라 더 줄이기 어려울 뿐더러, 발열 때문에 회로 안정성이 떨어진다. 향후 사물인터넷(IoT) 시대에 빅데이터를 처리하려면 회로 집적도가 더 높아져야 하기 때문에, 2진법 컴퓨터는 위기에 봉착했다고 할 수 있다.
3진법 컴퓨터를 구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3진법으로 정보를 변환하고 처리할 소자를 개발하는 것이다. 과거 세툰 컴퓨터는 진공관을 이용해 -1, 0, 1의 3진법을 구현했다. 하지만 진공관으로는 빅데이터를 다룰 3진법 컴퓨터를 만들 수 없다. 3진법 신호를 하나의 소자에서 구현할 수 없고, 현재의 반도체 집적회로처럼 소형화시킨 소자를 양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소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세계 곳곳의 연구자들이 차세대 3진법 컴퓨터를 구현할 소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기존의 2진법 소자를 이용해 2진 신호를 0과 1, 2 세 가지 상태로 변환하는 집적회로를 만드는 방법과, 새로운 소자를 이용해 세 가지 상태를 모두 나타내게 만드는 방법이다.
방법1. 2진법 소자로 3진법 구현하자
집적회로를 잘 설계해 전류 신호를 세 가지 상태로 나타내려는 방식이다. 기존의 반도체 기술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생산 공정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등 대대적인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산업계에서 선호할 만한 방식이다. 반도체를 이용한 집적회로 소자는 음(-)의 전압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세툰 컴퓨터가 -1과 0, 1로 3진법을 구현한 것과 달리 0과 1, 2를 3진법 신호로 쓴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기존에는 2진법 소자 두 개만 쓰면 됐지만, 상태 하나를 늘리기 위해 소자의 개수를 여러 개로 늘려야 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이 된다. 소자의 집적도와 소모 전력을 낮추기 위해 3진법을 구현하려는 건데 오히려 집적도와 소모 전력을 높이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과거 2진법 컴퓨터를 세계적으로 전파한 ‘전도사’ 역할을 했던 IBM은 탄소나노튜브를 도입해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필요한 소자 개수가 늘어나더라도 소자의 연산 효율을 높이면 문제를 상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탄소나노튜브 전계효과트랜지스터(CNTFET)’가 그 주인공이다. CNTFET은 탄소나노튜브의 지름을 조절하면 장치가 동작을 시작하는 ‘문턱전압’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다. 이것으로 3진법 상태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탄소나노튜브의 두께 자체가 nm단위로 워낙 얇아서 0.1nm 단위로 정교하게 조절해야만 하는데, 관련 기술이 아직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집적회로 안에 들어 있는 약 10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일일이 정밀하게 조정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다. 이론적으로는 좋은 소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다. 현재 시제품으로 구현된 모델은 없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식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방법2. 세 가지 상태 만드는 똑똑한 소자 만들자
최근 학계에서 주목하는 방법은 ‘On’과 ‘Off’ 두 가지 상태밖에 없는 전기 신호를 받아서 세 가지 상태를 나타내는 똑똑한 소자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그래핀과 흑린 등 독특한 물성을 나타내는 2차원 물질들이 등장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3진법 소자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최근 국내 연구팀이 선보인 따끈따끈한 연구 성과 세 편을 소개한다.
불순물(도핑) 추가해 3가지 신호 만든다
김경록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팀은 기존 2진법 소자의 구조 및 공정을 그대로 적용해 3진법 소자와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전기전자학회(IEEE)에서 발행하는 ‘전자기기학술지’ 2015년 8월호에 발표했다(doi: 10.1109/TED.2015.2445823).
김 교수팀의 전략은 전자나 정공 같은 불순물(도핑)을 많이 첨가한 p형과 n형 반도체 사이를 통과해서 흐르는 전류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전류는 소자를 제어하는 게이트 전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세기로 흐르는 게 특징이다. 전압이 높아져도 흐르는 전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다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면 마치 계단 모양처럼 전류량이 급격히 많아지는 소자를 제시한 것이다.
만드는 방법은 기존 반도체 공정을 그대로 활용한다. 똑같은 트랜지스터인데 특정 부위에 첨가하는 전자 또는 정공(도핑)만 전보다 높이면 된다. 연구팀은 이 방법으로 안정적인 3진법 인버터를 만들었다. 인버터는 논리에 따라 0을 1로, 1을 0으로 바꾸는 기능을 하는 장치로,복잡한 연산을 수행할 집적회로를 만드는 기본 요소다. 3진 인버터는 0을 2로, 1을 1로, 2를 0으로 바꾼다. 김 교수는 “공장에서 쓰고 있는 안정적인 기술로3진법 집적회로를 구현한 것”이라며 “이 소자를 활용할 수 있는 회로 시스템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고 말했다.
새로운 재료로 문턱 전압 두 개로
박진홍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팀은 2차원 반도체 물질인 흑린과 이황화레늄(ReS2)을 결합해 세 가지 신호를 구현했다. 보통 소자는 전압이 높아질수록 흐르는 전류가 많아진다. 하지만 이 소자는 특정 전압 구간에서는 전류량이 급격히 떨어진다. 즉, 전압을 계속 높여 줬을 때 나타나는 전류 곡선이 ‘N’자 모양을 나타내 문턱전압이 두 개가 된다. 연구팀은 흑린과 이황화레늄을 수직으로 쌓아올려 만든 소자에 p형 트랜지스터 하나를 더해 3진법 인버터를 만들었다. 연구 결과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2015년 11월 7일자에 발표됐다(doi:10.1038/ncomms13413).
그래핀이 3진법을 구하리니!
이병훈 GIST 신소재공학부 교수팀은 2차원 도체인 그래핀을 이용해서 계단 형태의 전압-전류 상태를 구현했다. 그래핀과 금속을 접합시키면 둘 중 어느 쪽이 전자를 잘 잃는가에 따라 그래핀이 n형(전자 얻음) 또는 p형(전자 잃음)으로 도핑된다. 이때, 그래핀과 금속이 만나는 부분에 얇은 금속 띠를 만들어 주면 전압에 따른 전류 특성이 세 가지로 구분되는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실험적으로 이를 구현한 적은 없었는데, 연구팀은 두 물질의 경계면에 고압으로 수소를 넣어 주는 공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전압을 높이면서 이 소자를 동작시켰을 때, 하나의 소자에서 세 개의 전류 신호 상태가 형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일부 보고된 3진법 소자는 n형 또는 p형 소자였는데 반해, 이 연구에서는 n형과 p형 소자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다”며 “1960년 이후 반도체 회로의 기본 구조가 돼 온 상보성 회로를 3진법 소자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 결과는 ‘사이언티픽 리포트’ 2016년 12월 19일자에 발표됐다(doi:10.1038/srep39353).
현재는 3진법 소자 연구는 춘추전국시대다. 이들 가운데 향후 3진법 시스템의 표준으로 채택되는 기술은 현재의 트랜지스터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3진법 소자의 중요성은 컴퓨터의 연산 효율을 향상시키고 소비 전력을 줄여 사물인터넷(IoT)과 빅데이터 시대를 앞당긴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2진법 다음 단계의 디지털인 3진법을 발판으로 4진법과 5진법, 10진법을 구현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드웨어로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3진법 이상의 논리 상태를 구현할 수 있는 회로를 ‘다치논리회로(Multi Valued Logic Circuit)’라고 부른다.
강석형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는 “다치논리회로는 컴퓨터로 하여금 주어진 문제를 풀어 답을 내리는 것을 넘어 유추를 하는 등 사람의 사고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현재의 컴퓨터는 주어진 논리대로 전류 신호를 연산한 뒤 결과를 참 아니면 거짓으로 출력한다. 연산 결과가 0이거나 1일 때만 답을 내릴 수 있다. 0.5나 0.7은 답을 내릴 수 없는 계산 오류다. 하지만 컴퓨터가 이해하는 논리적인 상태가 늘어나면 컴퓨터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이 다양해질 수 있다.이런 논리는 올해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과의 대결로 주목받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알파고와 맞닿아 있다. 알파고는 수백 대의 컴퓨터가 어마어마한 전력을 소비하면서 계산해 인간의 직관을 모방하는 소프트웨어다. 하지만 다치논리회로가 구현되면 적은 양의 전력을 써서 인간의 사고를 모방할 수 있다. 인간의 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하지만 3진법을 비롯한 다치논리회로의 전망은 아직 장밋빛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2진법 소자의 시대가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1990년대부터 나왔지만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서 수명이 계속 연장되고 있다. 다치논리회로의 표준 기술이 무엇이 되는지에 따라 기업체가 생산공정을 모두 바꿔야할 수 있고, 소자를 넘어 소프트웨어에 대한 연구도뒷받침 돼야 한다.
김경록 UNIST 교수는 이런 점에서 “아직 3진법 컴퓨터가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러 대안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정도인 셈이다. 김 교수는 “다만 빅데이터 등의 수요가 있기 때문에 10년내로는 특정 응용 분야에 대한 3진법 컴퓨터의 시제품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영준 과학동아 기자 | jxabbey@donga.com
<본 기사는 2017년 1월 ‘과학동아’에 “3진법 소자, 하드웨어 인공지능을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