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이나 페인트, 화장품 등 다양한 화학제품의 재료인 고분자를 다룰 중요한 원리가 밝혀졌다. 액체 상태에 가까운 흐물흐물한 고분자 덩어리가 다른 물체를 만나는 경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살펴본 결과다.
백충기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팀은 전단 흐름(Shear flow) 아래서 고분자 용융체(Polymer melts)에 일어나는 ‘계면 슬립(interfacial slip)’의 원리를 분자 수준에서 밝혀냈다. 전단 흐름은 묽은 액체가 흐르는 방향과 수직인 힘을 받을 때의 속도장을 의미한다. 고분자 용융체는 분자량이 1만 이상인 고분자가 용매 없이 순수하게 녹아있는 상태를 뜻한다.
전단 흐름 아래 고분자 용융체는 다른 물체와 만나는 경계면에서 미끄러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계면 슬립’이라고 하는데, 이 현상은 플라스틱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고분자 공정 불안정성(Melt instability)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또 생체막과 고분자 박막 등 계면이 있는 시스템에서 계면 슬립은 물질의 특성(물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따라서 계면 슬립이 어떤 원리로 발생하는지 알게 되면 품질이 좋은 플라스틱을 만들거나, 계면 시스템의 물성을 예측하는 게 가능해진다.
이번 연구에 제1저자로 참여한 정소담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박사과정 연구원은 “계면 슬립은 고분자 용융체가 경계면보다 느리거나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현상으로서 물질 특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한 예로 플라스틱의 재료인 고분자 용융체가 성형 틀의 경계면에서 미끄러져 표면이 거칠어지거나 금이 가는 현상을 들 수 있다”며 “이 현상의 근본적인 원리를 풀어내고 싶어 분자 수준에서 접근하는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경계면에서 미끄러짐이 발생하는 정도에 따라 3가지 영역으로 구분해 연구를 진행했다. 구분 기준은 고분자 용융체와 벽면에 주어지는 속도다. 느린 속도가 1구간, 중간 속도가 2구간, 빠른 속도가 3구간이다.
유체의 움직임이 느린 1구간에서 분자들은 표면과 수직 방향에서 힘을 준 방향으로 회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현상은 표면과 고분자 사이의 마찰력을 감소시켜 고분자들이 힘을 준 방향으로 더 잘 미끄러지게 하는 요인이다.
중간 속도로 유체가 움직이는 구간에서는 고분자들이 표면에 붙었다 떨어지는 움직임을 반복했다. 특히 길이가 긴 물질을 사용하면 표면 근처 고분자와 덩어리 속에 있는 고분자 사이에 얽힘이 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붙었다가 떨어지는 움직임은 미끄러짐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얽힘이 풀리는 현상은 표면에서 고분자가 덜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힘을 더 많이 줘서 유체의 움직임 속도가 빨라지자 고분자들이 표면 근처를 금방 떠나서 회전하고 구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표면과 고분자 사이에 상호작용이 줄어들어 고분자가 표면에 붙어있지 못하고 미끄러져버리는 등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정소담 연구원은 “고분자 물질의 종류와 경계면의 구조에 따라 경계면 미끄러짐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수는 있다”면서도 “고분자 용융체 세계에서 벌어지는 큰 틀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백충기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고분자 용융체들의 세계에서 경계면 미끄러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예측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라며 “앞으로 경계면 현상의 근본적인 특성과 다양한 유변학적 현상, 경계면 고분자 시스템에서 보이는 성질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고분자 물리와 유체역학에서 필수적인 저널로 꼽히는 ‘유변학 저널(Journal of Rheology, Top 6.67% in Mechanics)’ 2월 1일자로 출판됐다. 이 저널은 산업에서 많이 사용되는 유변학에 관한 실험적, 이론적 결과와 모델에 대한 연구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