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와 중수소를 분리하는 강력한 물질이 개발됐다.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성 물질’인데, 기존에 따로 쓰이던 두 전략을 한 번에 구현한다. 그 결과 현재까지 보고된 중수소 분리 효율 중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문회리 자연과학부 교수팀은 다공성 물질인 ‘금속–유기 골격체(MOF)’에 간단한 처리를 해 중수소를 효율적으로 분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번 연구는 오현철 경남과기대 교수, 마이클 허셔(Michael Hirscher) 막스플랑크연구소 박사팀이 공동으로 진행했으며 강성구 울산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번에 개발한 시스템은 중수소를 분리하는 원리인 ‘운동 양자체(KQS) 효과’와 ‘화학적 친화도 양자체(CAQS) 효과’를 동시에 구현한 최초의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이 내용은 미국화학회지(JACS) 온라인 속보(9월 23일자)로 공개됐으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표지 논문으로 선정됐다.
중수소는 수소에 중성자가 하나 더 있는 수소의 동위원소다. 이 물질은 미래 에너지원으로 꼽히는 핵융합 발전의 핵심원료이자, 원자력 발전과 연구용 장비 등에 쓰이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중수소는 전체 수소 중 0.016%로 극히 미미하다. 또 수소 혼합물에서 중수소를 분리하기도 어려워 매우 비싸다.
중수소를 얻으려면 수소 혼합물에서 중수소만 골라내야 한다. 하지만 동위원소는 물리‧화학적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분리 기술이 필요하다. 최근 과학자들은 ‘금속-유기 골격체(MOF)’를 설계해 중수소를 효율적으로 골라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른바 ‘양자체 효과’를 이용하는 전략이다.
이번 연구에 제1저자로 참여한 김진영 UNIST 자연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쌀과 좁쌀을 체(sieve)로 쳐서 분리하듯 중수소와 수소를 양자체(quantun sieve)에 통과시켜 골라낸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쌀과 좁쌀은 크기 차이를, 중수소와 수소는 양자(quantum) 차이를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중수소 분리 기술에는 화학적 친화도 양자체 효과와 운동 양자체 효과를 각각 쓰는 전략이 시도됐다. 그런데 문회리 교수팀은 두 양자체 효과를 한 시스템에서 구현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둘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얻은 것이다.
연구진은 먼저 화학적 친화도 양자체 효과를 얻기 위해 중수소와 화학적 친화도가 높은 다공성 물질인 ‘MOF-74’를 선택했다.
그 다음 이 물질의 기공 내부에 이미다졸(imidazole) 분자를 도입해 구멍 크기를 조절했다. 수소보다 미세하게나마 작은 중수소만 통과시키도록 설계해 운동 양자체 효과를 구현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공성 물질 ‘MOF-74-IM’에서는 중수소가 조절된 구멍 내부로 빠르게 확산되는 동시에, 내부에 있는 흡착 자리에 화학적으로 강하게 달라붙을 수 있었다. 이때 중수소 분리 인자는 최대 26을 나타냈는데, 수소 1개당 중수소 26개를 골라낸다는 의미다. 참고로 기존 다공성 물질을 이용한 중수소 분리 연구에서 보고된 분리 인자는 동일 온도에서 최대 6이었다.
문회리 교수는 “기존에도 양자체 효과를 이용해 중수소를 분리하는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두 양자체 효과를 동시에 가진 분리 시스템은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며 “지구상에서 귀한 자원인 중수소를 얻는 획기적인 기술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이어 “하나의 시스템에서 두 양자체의 효과를 동시에 구현하는 전략은 그간 분리하기 어려웠던 삼중수소 같은 다양한 동위원소와 가스 혼합물에도 적용할 수 있다”라며 “중수소뿐 아니라 다양한 가스 혼합물을 효율적으로 분리할 새로운 아이디어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우수과학연구센터(SRC), 핵융합기초연구사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등의 지원으로 수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