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면 폐가 늘어나듯 기체를 받아들이면 구멍이 커지는 ‘다공성 물질’이 있다. 이 물질을 이용해 비싼 ‘중수소’를 쉽게 분리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수소 기체를 넣어 구멍이 커지는 순간에 맞춰 중수소가 더 빠르게 안쪽으로 치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문회리 자연과학부 교수팀은 경남과기대의 오현철 교수,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마이클 허셔(Michael Hirscher) 박사와 함께 중수소를 분리하는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flexible metal-organic framework)’ 시스템을 개발해 미국화학회지(JACS) 12월 4일 온라인 속보로 발표했다.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는 기체의 온도나 압력에 영향을 받아 구멍이 커지는 독특한 물질이다. 외부 자극만으로 기공(氣孔)이 팽창하기 때문에 복잡한 설계 없이 동위원소를 분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문회리 교수팀은 대표적인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인 ‘MIL-53’을 이용해 중수소를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다공성 물질에 외부 자극을 줘서 동위원소 기체를 손쉽게 분리하는 방식을 제안한 최초의 연구라 학계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제1저자인 김진영 UNIST 자연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가 외부자극에 노출되면 미세한 구멍(細孔)이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호흡 현상(breathing effect)’를 보인다”며 “이를 이용하면 원하는 기체만 골라 흡착시키거나 탈착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 교수팀은 수소 기체를 만날 때 기공 구조가 바뀌는 ‘MIL-35(Al)’을 선택해 중수소 분리에 도전했다. 이 물질은 양쪽 끝이 뚫린 긴 고무관처럼 생긴 대표적인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다.
MIL-35(Al)의 작은 기공(0.26㎚, 1㎚=10억 분의 1m)은 극저온(-233℃)에서 수소 기체를 만나는 순간부터 커져서 큰 기공(0.85㎚)으로 변한다. 기공의 확장은 입구부터 시작해 중심부로 연속해서 진행된다. 이때 중수소는 작은 기공이 있는 중심부로 먼저 이동한다. 이들이 다공성 물질의 벽면에 먼저 흡착되기 때문에 뒤따라온 수소는 다시 빠져나가게 된다. 결국 MIL-35(Al)에는 중수소만 남게 되는 것이다.
문회리 교수는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의 기공 크기가 변하는 중에 중수소를 가장 잘 골라낼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며 “이 때를 잘 파악하면 복잡하게 분리 시스템을 설계하고 가공하지 않아도 손쉽게 최고의 효율로 중수소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노출 온도와 압력, 시간을 바꿔가며 기공 구조를 체계적으로 조절해 최적의 기공 크기를 찾아냈다. 그 결과 MIL-53(Al) 1g 당 중수소 12㎎이라는 많은 양을 분리할 수 있었다. 참고로 기존 연구에서는 같은 온도에서 분리 인자 6, 중수소 분리양은 다공성 물질 1000g 당 중수소 5㎎에 그쳤다.
오현철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수소 동위원소 분리에서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의 잠재력을 입증할 수 있었다”며 “이 연구는 다른 동위원소 혼합기체 분리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핵융합기초연구사업, 우수과학연구센터(SRC), 신진연구자지원사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등의 지원으로 수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