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속에 사는 해조류에는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이 달라붙지 않는다. 바늘 같은 돌기들이 촘촘한 미세표면과 미끈한 피막 덕분이다. 이 모양을 본 딴 ‘초강력 방오막(Anti-biofilm materials)’이 개발돼 주목받고 있다.
정훈의 기계항공 및 원자력공학부 교수팀은 박테리아를 비롯한 미생물이 표면에 못 달라붙게 하는 새로운 ‘방오(防汚, Antifouling) 소재’를 개발했다. 방오 기능이 우수하면서 단단한 물질(PEGDMA)로 뾰족한 바늘기둥이 무수한 미세구조를 만들고, 그 위에 친수성이 강한 소재(MPC)를 얇게 씌워 피막과 비슷한 수막(水膜, Hydration Layer)을 형성했다.
정훈의 교수는 “파래나 갈조류 같은 해조류의 표면을 보면 미세한 돌기들이 있는데, 이 구조를 본 따 박테리아가 접근하면 찔려 죽는 미세표면을 만들었다”며 “그 위에 물로 형성된 얇은 막은 박테리아의 접근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고 새로운 방오 소재의 장점을 강조했다.
방오 소재는 표면에 각종 오염물이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물질이다. 주로 선박이나 해양시설에서 물이 닿는 부분에 발라 해양생물의 부착을 막는 데 쓰인다. 최근에는 인공관절이나 치아 임플란트 같은 의료기구에서 노폐물의 흡착을 막거나, 가습기 등의 생활기기 내부에 생기는 바이오필름(Biofilm)을 방지할 기술도 연구되고 있다.
기존에는 화학물질을 표면에 바르는 방식으로 방오 처리를 했다. 그런데 박테리아가 화학물질에 내성을 갖거나, 표면이 긁혀 손상되면 방오 기능이 떨어졌다. 또 화학물질 자체의 독성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 대안으로 표면에 나노미터(㎚, 1㎚는 10억 분의 1m) 수준의 미세돌기를 촘촘히 세우는 기계적 방오가 주목받고 있다.
공동 제1저자인 박현하 기계공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은 “자연계에는 흔하게 발견되는 미세돌기 표면에 박테리아가 닿으면 세포벽이 손상돼 사멸한다”며 “이런 미세표면의 항균 효과는 이미 입증됐지만, 죽은 박테리아의 사체가 쌓이는 건 문제였다”고 전했다.
연구진은 나노 바늘이 촘촘한 미세표면에 해조류처럼 피막을 입히는 아이디어를 냈다. 미세표면은 딱딱한 하이드로겔(PEGDMA)로 만들어 물속에서도 구조를 유지하도록 했고, 그 위에 MPC라는 분자를 얇게 씌운 것이다. MPC는 물을 잘 잡아당겨 표면 위에 수막을 형성했다.
공동 제1저자인 선가현 기계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미세표면에 찔려 죽은 박테리아는 물로 씻기면서 방오 기능이 한층 강화된다”며 “미세표면과 피막을 통해 이중으로 방오할 수 있어 넓은 범위의 박테리아를 모두 대응할 수 있으며, 긁히거나 손상돼도 기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해조류를 비롯한 해양생물의 미세표면을 추가로 연구해 방오 기능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세표면 기술은 선박이나 해상장비는 물론 가습기 같은 생활가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훈의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해로운 박테리아를 없애려 살균제를 사용하는 대신 기기 표면에 새로운 방오막을 도입 가능하다”며 “이 기술을 적용하면 정수기나 에어컨 등의 생활기기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사용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미국화학회(ACS)에서 발행하는 ACS 매크로 레터스(ACS Macro Letters) 1월호 표지 논문으로 출판됐다. 연구 수행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연구재단의 자연모사혁신기술개발사업의 지원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