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핵 속 DNA를 전부 연결하면 약 2미터(m) 정도 됩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작은 공간에 엄청 중요한 정보가 차곡차곡 들어 있죠. 여기에 물과 기름처럼 서로 분리되는 원리가 쓰이고 있었어요.”
김하진 생명과학부 교수가 세포핵 속 DNA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는 ‘DNA 상분리 (Phase Separation)’ 개념을 제시했다. 기존 생물학에서와 다르게 물리적 원리로 DNA의 작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엄청나게 긴 DNA가 무수히 접히고 말려서 세포핵에 들어가 있는데 그 안에 공간적으로 구분된 영역들이 생긴다. 세포가 당장 활용할 DNA 정보들은 열린 구조로 만들어서 쉽게 접근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뭉쳐서 압축파일처럼 보관하는 식이다.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DNA 영역들이 분리된 공간을 만들어 세포가 효율적으로 정보를 사용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물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상분리’라는 개념으로 다룬다. 온도나 압력, 구성 분자 등이 달라지면서 고체, 액체, 기체 뿐 아니라 같은 액체 내에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상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물, 단백질, 지질 등의 다양한 분자가 뒤섞여 있는 생체 시스템에서도 흥미로운 상분리 현상들이 보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타우(Tau) 단백질들이 상분리된 방울을 만들어 알츠하이머를 일으킨다거나, RNA의 반복서열이 역시 상분리된 집합체를 만들어 헌팅턴 병을 일으킨다는 가설들이 있다.
김하진 교수는 “물리학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상분리 현상이 DNA에서도 발생한다는 걸 처음 제시한 연구”라며 “DNA 상분리가 유전자 발현과 줄기세포 분화 등 세포 활동을 결정지을 가능성을 분자 수준에서 보였다”고 설명했다.
DNA 상분리에는 정전기적인 힘이 작용한다. 기본적으로 DNA는 강한 음전하(-)를 갖기 때문에 서로 밀어내는 힘이 강하다. 그런데 특정 종류의 다가양이온(+)이 들어가면 서로를 끌어당기며, 이 정도는 DNA의 서열에 따라 달라진다. 김하진 교수팀은 이 내용을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고 실험으로 확인해 2016년 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했다. 이번에는 그 원리가 폴리아민과 핵산 분자의 메틸기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DNA는 네 가지 염기로 이뤄지는데, 반드시 아데닌-티민(Adenine-Thymine, AT), 구아닌-시토신(Guanine-Cytosine, GC)으로 짝을 지어 이중나선의 양측에 배열된다. 이중 AT 쌍이 풍부하거나 연속해 나올수록 DNA 사이의 인력이 강해졌다.
김하진 교수는 “티민은 ‘C5 메틸기’라는 걸 가지는데, 흥미롭게도 이걸 시토신에 더해주면 GC 쌍이 마치 AT 쌍처럼 강한 인력을 나타냈다”며 “시토신에 붙는 C5 메틸기는 후성유전학에서 가장 주요한 DNA의 화학변이라 후성유전적인 염색체 구조 조절과 줄기세포 분화와의 연관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연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저명한 생물학 저널 ‘뉴클레익 에시드 리서치(Nucleic Acids Research, IF: 10.162)’ 7월 19일자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한편, 이번 연구처럼 최근 학계에서는 물리적인 원리로 유전을 비롯한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다. 물리학을 전공한 김하진 교수는 이 분야에서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는 젊은 과학자다. DNA 염기서열의 유전정보뿐 아니라, 이 서열에서 DNA의 공간적 배치를 조절하는 물리법칙을 찾아내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는 게 그의 목표다.
김 교수는 “아직까지 생명현상에서 인류가 명확히 알아낸 것은 미미한 수준이며, 특히 DNA가 위치한 세포핵은 그 복잡성 때문에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며 “특정 단백질들의 기능으로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분자생물학적 접근과 더불어 물리학, 화학적 접근도 중요한 발견을 제시할 가능성이 많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