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과학전문잡지 [과학동아]에서 연재하는 ‘언니오빠 논문연구소’ 코너에 이상면 UNIST 박사과정 연구원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전기 전도성을 지닌 유기물을 발견해 노벨상을 수상한 앨런 히거(Alan Heeger) UC산타바바라 교수의 논문을 통해 유기 태양전지 기술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디스플레이를 휘거나 접어서 쉽게 휴대하거나, 커튼이나 벽, 의류 등 다양한 곳에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유연성 전자 소자 산업에 대한 연구가 각광받는 이유입니다. 때문에 최근 유기물(탄소 기반 화합물)을 이용한 전자 소자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유기 태양전지가 차세대 기술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전기가 흐르는 유기물이 있다?
사실 유기물을 전자기기에 활용한 지는 반세기가 채 되지 않습니다. 또한 유기물을 전자기기에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우연한 계기로 확인됐습니다.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원 신분으로 1967년 해외 연수를 떠난 변형직 박사가 이케다 토미키 일본 도쿄공업대 교수의 고분자화학 연구팀에서 진행한 합성 실험이 그 시초입니다.
당시 변 박사는 실험에 필요한 시약을 실수로 1000배나 많이 넣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보통 얻어지는 검은색 분말 대신 밝게 빛나는 은색의 얇은 막이 형성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현상학적 분석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는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변 박사와 같은 연구실의 조교로 함께 연구를 진행했던 시라카와 히데키 박사가 약 10년 뒤 미국으로 건너가 앨런 맥더미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와 당시 벨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앨런 히거 박사와 함께 전도성 고분자에 대한 공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세 사람은 공동 실험을 통해 이 은색 막이 금속처럼 전기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추가적인 합성을 통해 최초의 전도성 유기물도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유기물은 플라스틱 재료로만 사용됐습니다. 전기선을 플라스틱으로 감싸는 것처럼 플라스틱이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의 특성만 보였기 때문에, 전도성을 지닌 유기물의 개발은 그야말로 획기적이었습니다. 실수에서 시작된 우연한 발견은 지금까지 다양한 전도성 및 반도체성 유기물 개발로 이어졌고,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에 있는 새로운 연구 분야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결국 이들 과학자 3명은 200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특히 히거 교수가 프레드 우들 당시 UC산타바버라 교수와 함께 1995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은 고분자(전자 주개 물질)와 풀러렌 유도체(전자 받개 물질)를 사용한 최초의 논문입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유기 태양전지의 기본 물질 구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이 발표되기 전까지 고분자를 이용한 태양전지의 효율은 0.01%에 불과했습니다. 사실상 태양전지를 구동하기 힘든 수준이었죠. 하지만 히거 교수는 1985년 처음 발견된 탄소 동소체의 일종인 풀러렌을 고분자와 함께 혼합막으로 사용하면 광전도가 뛰어나다는 점에 착안해 전기 생산효율이 3%에 이르는 태양전지를 제작했고,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의 태양전지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전도성 유기물은 어디에 쓰일까?
최초의 전도성 유기물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40여 년간 새로운 전도성 유기물들이 여럿 개발됐습니다. 생산성이 높고, 합성이 쉬우며, 소자 공정이 간편하고, 가볍고 유연한 ‘신상’ 전도성 유기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센서를 포함해 디스플레이, 트랜지스터, 태양전지 등 유기물을 응용한 전자소자의 개발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이들은 기존에 주로 사용되던 무기물인 실리콘 기반 전자소자의 단점으로 꼽히던 가격과 제작 공정, 두께, 유연성 등의 한계를 모두 뛰어 넘었습니다. 유기 디스플레이는 현재 상용화 단계로 시장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환경과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자연 친화적인 유기 태양전지에 관한 연구가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다만 유기 태양전지는 실리콘 태양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 기간이 짧습니다. 1990년대 전도성 유기물 개발에 기여한 히거 교수팀은 작은 유기물이 반복적으로 많이 연결된 반도체성 고분자를 이용해 차세대 태양전지를 개발했습니다. 이후 태양광을 전기로 바꾸는 효율과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기 태양전지는 광전효과를 기반으로 전기가 흐르는 물질에 일정 조건의 빛을 쪼였을 때 물질의 표면에서 빠져나오는 전자와 동시에 발생하는 정공(hole)을 이용해 전기를 발생시킵니다.
유기 태양전지는 다른 소재의 태양전지와 달리 두 종류의 상반된 유기물들인 전자 주개 물질과 전자 받개 물질이 필요합니다. 각 물질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 주개 물질은 태양에너지를 받으면 광전효과에 의해 전자를 만들고, 이 전자가 전자 받개 물질로 이동해 최종적으로 전극에 모입니다. 이런 흐름이 반복되면서 전류가 발생합니다.
전기 생산효율은 얼마나 될까?
태양전지를 상용화하려면 효율이 10% 이상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유기 태양전지의 구조와 제조 공정, 그리고 새로운 고성능 유기물 개발이 현재까지 활발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히거 교수가 사용했던 반도체 고분자 형태의 유기물은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 초기에는 전자를 발생시키는 데 태양광의 2~30%만 흡수할 정도로 전기 생산 효율(2~3%)이 낮았습니다.
필자가 속한 UNIST 에너지공학과 연구팀은 태양광의 사용 효율을 높이기 위해 2009년부터 다양한 고분자 유기물을 합성해왔습니다. 최근 태양광 흡수율이 높은(7~80%) 고분자 유기물을 개발해 전기 생산효율이 12%로 높은 태양전지를 제작했습니다.(바로가기)
또 연구팀은 적은 수의 유기물을 연결해 만드는 단분자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단분자는 태양광 흡수력과 전도도가 고분자와 비슷해 학계에서 관심이 높은 유기물입니다. 특히 단분자는 고분자에 비해 용해도가 높고 합성이 쉬워 전자 주개 물질과 전자 받개 물질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기 생산효율을 14%까지 높여 유기 태양전지의 상용화를 앞당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플렉서블(휘어지는) 태양전지 등 유연성 소자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기존 태양전지는 웨이퍼나 유리 등 단단한 기판에 제작되기 때문에 힘을 주면 파손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 유연한 기판을 사용하더라도 무기물이 손상돼 성능이 저하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연구팀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연한 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재질의 기판과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을 전극으로 사용하고, 실제 광전효과를 내는 핵심 재료인 유기물을 이용해 태양전지를 제작했습니다. (바로가기)
이를 이용해 반지름이 3mm가 될 때까지 구부릴 수 있는 플렉서블 태양전지도 만들었습니다. 100회 이상 구부려도 초기 효율의 90% 이상을 유지한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소메야 타카오 일본 도쿄대 교수팀은 물에 씻을 수 있는 플렉서블 태양전지를 개발해 최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바로가기)
현재 실리콘 태양전지가 유기 태양전지보다 우수한 점은 효율과 내구성, 수분 안정성 등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는 앞으로 유기 태양전지가 극복해야 할 점이기도 합니다. 연구 기간을 고려하면 유기 태양전지의 미래는 밝습니다. 플렉서블을 넘어 말리고 휘어지며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스트레처블 태양전지까지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글: 이상면 lsm_205@naver.com
필자는 UNIST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지도교수 양창덕)으로 재학 중이다. 태양전지와 트랜지스터를 포함해 전자 소자에 사용되는 유기물의 합성 및 물성 분석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