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세계에선 일반적인 물리법칙이 무너진다. 물질 사이에 늘 존재하는 무시할 만큼 작은 힘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직 이런 힘에 대한 총체적 이해는 부족한데, 최근 이를 측정할 새로운 연구가 나와 주목받고 있다.
조범석 자연과학부 화학과 교수팀은 ‘물질파(matter-wave)’의 새로운 반사(회절) 매커니즘을 검증함으로써 나노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분산 상호작용’을 연구할 토대를 마련했다. 분산 상호작용은 물질 속 전자들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아주 미미한 힘으로, 나노미터(㎚, 1㎚는 10억 분의 1m) 크기의 물질에서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워낙 미세한 힘이라 측정이 매우 힘든데, 이번 연구로 물질파를 이용해 측정할 가능성이 열렸다. (보도자료 바로가기)
이번 연구는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편집자의 추천 논문(Editer’s Suggestion)으로 1월 31일 발표됐다. 편집자의 추천은 특별히 중요하고 혁신적이며 널리 영향력이 있을 만한 논문만 골라 선정된다. (논문 바로가기)
물질파는 물질이 입자가 아닌 파동의 성질을 보이는 경우를 말하는데, 물질의 질량이나 속도가 작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로 물질을 이루는 원자나 전자에서 볼 수 있으며, 물질파를 이용하면 나노 세계의 새로운 물리현상을 밝혀낼 수 있다.
조범석 교수팀은 선폭이 아주 좁은 ‘사각파형 회절판(square-wave grating)’에서 일어나는 물질파의 새로운 회절 현상을 검증해 분산 상호작용을 측정하는 방법 개발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사각파형 회절판은 일정한 주기로 사각형의 물체가 판 위에 올려져 있는 형태인데, 여기에 빛이나 물질파를 쏘면 장애물인 사각형을 돌아서 나아가는 회절 현상이 나타난다.
공동 제1저자인 이주현 화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나노 구조 표면이 울퉁불퉁할 경우를 측정하기 위해 사각형이 튀어나온 판 형태를 제작했다”며 “이런 표면에서 나타나는 분산 상호작용을 측정한 결과를 다양한 나노 구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400마이크로미터(㎛, 1㎛는 100만 분의 1m) 간격을 두고 사각형을 세운 사각파형 회절판에 헬륨(He)이나 중수소(D₂)로 이뤄진 물질파를 쏘았다. 이때 물질파는 회절판과 거의 평행하게 스치듯 입사시켰다.
공동 제1저자인 김이영 물리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사각형의 선폭을 200마이크로미터(㎛, 1㎛는 100만 분의 1m)부터 10마이크로미터로 줄인 사각파형 회절판을 만들어 실험을 진행했다”며 “선폭이 감소함에 따라 물질파의 반사 결과는 ‘주기성 반평면 집합체’의 이론값에 가까워졌다”고 전했다.
반평면(half plane)은 무한대로 펼쳐진 평면을 한 직선으로 잘라 둘로 나눈 한쪽을 일컫는 말이다. 광학에서는 이러한 이상적인 구조를 기본 모델로 활용해 회절 현상을 설명한다. 이런 반평면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면 주기성 반평면 집합체가 되는데, 여기서 일어나는 회절에 관한 이론은 이미 알려졌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 이론을 물질파 광학에서 처음으로 증명함으로써 물질파 회절로 분산 상호작용을 측정할 토대를 마련했다.
조범석 교수는 “사각파형 회절판에 물질파를 스치듯 입사시키는 방법으로 나노 구조 표면에서 나타나는 분산 상호작용을 측정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며 “다양한 나노 구조의 분산 상호작용을 측정해 나노미터 크기의 전자제품과 부품 제조 시 문제가 되는 영향력들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사각파형 회절판은 이창영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팀에서 제작했으며, 실험은 독일 프리츠 하버 연구소의 스침 입사 물질파 광학 장치를 이용해 진행했다. 연구 수행은 교육부(장관 유은혜)-한국연구재단(이사장 노정혜)의 중견연구자지원사업과 글로벌박사양성프로그램(GPF)의 지원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