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작동된 선풍기의 모터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방 안에 켜진 형광등, 100m 달리기를 마친 사람의 몸,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 등에서도 열 에너지는 끊임 없이 주변으로 방출된다. 이처럼 사용되지 못하고 곳곳에서 버려지는 열을 손쉽게 전기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어떨까.
손재성 신소재공학부 교수팀에서 연구하는 ‘열전 기술’을 이용하면 버려지는 열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 최근에는 고성능·고효율 열전소재를 개발해 눈기를 끈다. 열전 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재료를 얇게 만들어 구부러진 표면에도 붙일 수 있는데다 성능까지 높여 크게 주목받고 있다.
손재성 교수팀은 신호선 표준연 박사팀과 공동으로 ‘주석–셀레나이드(SnSe)’의 결정 구조를 나란히 정렬해 고효율 초박막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개발한 공정은 ‘재료를 용액에 녹여 열전 잉크로 합성한 뒤(용액공정) 가열하는 방식’이라 손쉽고 저렴하다. 제작된 소재의 성능은 기존 덩어리(bulk) 형태의 열전소재에 뒤지지 않았으며, 공정 자체도 간단해 다양한 분야로 응용할 잠재성이 크다.
열전소재는 소재 양쪽에서 나타나는 온도 차이를 이용해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는 물질이다. 이 소재로 열전발전기를 만들고 자동차나 선박의 엔진 등에 부착하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열전발전기의 구조나 원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성능을 더 높이려면 더 좋은 열전소재를 개발해야 했다. 특히 2014년 처음 보고된 주석–셀레나이드는 성능 면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촉망받는 열전소재다. 하지만 이 물질의 결정 구조를 제어하기 어려워 기대만큼 우수한 열전 효율을 보이진 못했다.
공동 제1저자인 허승회 UNIST 신소재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주석-셀레나이드는 종이가 층층이 쌓인 책처럼 독특한 층상형 결정구조를 가지며, 이 구조가 나란한 단결정에서 열전효과가 나타난다”며 “종이가 구겨지면 책을 깨끗하게 인쇄할 수 없는 것처럼 다결정 구조에선 높은 열전효율을 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진은 주석-셀레나이드를 특정한 방향으로 성장시킬 2단계 공정을 개발했다. 1단계 공정에서는 ‘주석–다이셀레나이드(SnSe₂)’ 박막을 만들고, 2단계 공정에서 열처리해 ‘주석–셀레나이드(SnSe)’ 박막을 만드는 방식이다. 주석-다이셀레나이드가 특정한 방향으로 잘 성장하는 원소의 일종이라는 점에 주목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공동 제1저자인 조승기 UNIST 신소재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주석-다이셀레나이드를 가열하면 셀레늄(Se) 원자가 증발하며 주석-셀레나이드가 된다”며 “앞서 형성된 주석-다이셀레나이드 결정이 이정표가 되기 때문에 주석-셀레나이드 결정 구조도 가지런하게 정렬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제작된 주석-셀레나이드 박막은 기존 연구에 비해 전기적 특성이 10배 이상 우수했다. 또 단결정으로 성장시킨 덩어리 형태의 주석–셀레나이드 소재와 견줄 정도로 높은 성능을 보였다.
연구진은 또 완성된 박막형 소재의 조성을 제어해 물성의 최적화도 용이하다는 점을 밝혔다. 열처리 온도와 시간을 조정하면 결정을 이루는 셀레늄 원자의 비율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주석-셀레나이드 박막을 각각 1분, 5분, 9분, 13분간 400℃에서 열처리한 물성도 보고했다.
손재성 교수는 “원재료에 상당한 고온과 고압을 가하는 기존 방법은 생산비가 비쌀 뿐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성장시키기 어려워 성능 확보가 어려웠다”며 “이번 기술은 간편하고 효율적일 뿐 아니라 주석-셀레나이드의 결정 방향까지 제어할 수 있어 향후 폭넓게 응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 2월 20일(수) 온라인판에 발표됐다. 서울대의 이원보 교수, 기계연 부설 재료연의 강전연 박사, 금오공대의 박노진 교수, 한양대의 장재영 교수팀도 이 논문에 참여했다.
연구 지원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저차원 소재게놈 제어평가기술 개발 사업,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추진하는 나노·소재원천기술개발사업 도전형소재기술개발프로그램 및 신진연구자사업을 통해 이뤄졌다.
한편 열전 물질이 녹아있는 용액의 점성을 조절하면 페인트처럼 붓으로 그릴 수 있는 열전 페인트도 제작할 수 있다. 나아가 3D 프린팅 기술과 접목시켜 원하는 형상으로 열전 소자를 제작할 수 있는 열전 3D 프린팅 기술로도 발전시킬 수 있다.
용액 공정을 통해서 주석-셀레나이드의 높은 열전 성능을 확보한 이번 연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후속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천기술이라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