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흐르지 않은 물질인 ‘부도체’ 중에는 ‘별난 물질’이 있다. 안쪽만 부도체이고 바깥쪽에는 전기가 흐르는 ‘위상부도체’다. 지금까지 위상부도체는 수학적인 계산으로만 증명됐는데, 실험으로 이 물질을 직접 가려내는 방법이 처음 제안돼 눈길을 끌고 있다.
박노정 자연과학부 교수팀은 물질에 한 방향으로 전압을 주면 나타나는 ‘스핀 홀 전도도(spin Hall conductivity)’를 이용해 위상부도체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측정한 전도도가 0으로 나타나면 일반적인 부도체이고 1, 2, 3 등의 똑떨어지는 덩어리 값(양자)로 나타나면 위상부도체가 된다. 참고로 도체는 양자화 안 된 불규칙한 값이 나온다.
박노정 교수는 “수학적으로 유도된 방식이 아닌 실험으로 관측할 수 있는 물리량을 통해 위상부도체의 특성을 구분해낼 수 있음을 밝혔다”며 “실리콘 반도체의 한계 때문에 만들기 어려웠던 초미세 전자장치 개발에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우리 주변의 물질은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기가 흐르는지 여부(전도도)를 기준으로 도체와 부도체를 나누거나,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지에 따라 자성체와 비자성체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런 기준만으로는 극한 환경에서 나타나는 별난 물질들을 모두 설명하기 어려워 ‘위상(phase, 位相)’이라는 수학적 개념이 도입됐다. 이런 개념으로 물질을 설명하는 방식을 제안한 물리학자 셋은 201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수학에서 위상은 반복되는 파동(wave)의 주기에서 시작점의 각도나 한 순간의 위치를 말한다. 물질의 경우는 원자 속 전자의 파동이 위상 차이를 가져온다. 전자의 파동 특성은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므로 어떤 물질이 위상부도체인지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험을 통한 측정값으로 위상부도체를 구분하고 자세한 특성을 파악하는 방법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박노정 교수팀은 위상부도체를 가리는 측정값으로 ‘스핀 홀 전도도’가 적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스핀(spin)은 전자의 자전을 말하는데, 물질마다 고유한 형태를 가진다. 위상부도체의 경우 물질 내부에 있는 스핀들이 평형을 이루는데, 전기를 흘려주면 같은 방향의 스핀끼리 정렬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관측해 스핀 홀 전도도를 측정할 수 있다.
제1저자인 신동빈 박사는 “도체의 경우 전자가 얼마나 많고(전자 농도), 또 자기장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하기 위해 ‘홀 전도도(Hall conductivity)’를 측정하고 있다”며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위상부도체의 스핀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스핀 홀 전도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홀 전도도는 물질에 전압과 자기장을 동시에 걸어서 나타나는 전자의 이동 특성이다. 보통 자기장이 커질수록 늘어나며 연속적으로 상승하는데, 미시세계에서는 연속적으로 바뀌지 않고 계단을 오르듯 증가한다. 이런 현상을 ‘양자화된 홀 전도도(Quantum Hall conductivity)’라고 하는데 별난 물질에서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연구진의 계산에 따르면 스핀 홀 전도도 역시 위상부도체라는 별난 물질에서만 ‘양자화된 스핀 홀 전도도(Quantum spin Hall conductivity)’를 나타냈다. 따라서 스핀 홀 전도도 측정으로 위상부도체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박노정 교수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에서 활약할 전자장치의 소재로 위상부도체도 활발히 연구되는 추세”라며 “스핀 홀 전도도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위상부도체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이번 결론은 향후 전혀 새로운 전자장치의 개발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2월 14일(목)자로 출판됐다. 연구 수행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실지원사업(BRL)’의 지원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