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예술융합전시회 ‘죽음공동선언(Joint Declaration of Death)’이 오는 1월 15일(토)까지 서울 영등포구 스페이스 나인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UNIST 사이언스월든 연구센터가 주관해 마련됐다. 사이언스월든은 과학과 예술, 인문학을 융합해 인간소외와 소득 불균형, 세대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온 연구 커뮤니티다. 사이언스월든은 지난 7년 간 수행해온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종결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는 의미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전시에는 김유경, 백다래, 송주형, 최정은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2021년 사이언스월든의 연구주제인 ‘죽음’의 개념을 차분한 호흡으로 집중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아이덴티티 기획을 맡은 조재원 UNIST 도시환경공학과 교수는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 오히려 끊임없이 죽어야 한다”며 “삶의 속도와 시간성의 방향에 대해 더 많은 가능성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했다”고 말했다.
총괄기획을 맡은 구지은 작가는 “이번 전시는 4명의 작가들이 삶의 속도를 지연시키고 ‘즉각적인 죽음, 되돌아가는 죽음’에 대한 수행적 태도를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선언적 의미로 시각화한 전시”라며 “의지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 동시대의 사회문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중은 생각한다. 고로 죽는다.
<죽음 공동 선언> 전시 서문
이 전시는 그간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도모해온 사이언스월든의 마지막 전시로서 2021년 연구 주제인 ‘죽음’의 개념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끝’과 같다고 여기곤 하지만, 끊임없는 끝과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 전시의 아이덴티티 기획을 맡은 조재원 센터장은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 오히려 끊임없이 죽어야 한다.”고 선언적 고백을 하였으며, 삶의 속도, 시간성의 방향에 대해 더 많은 가능성의 언어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물론,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생각이라는 것을 가장 복잡하게 하는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매우 막중하고 불가역적인 이미지로 통용되기에 그것을 차라리 회피하거나 망각하고 사는 것이라는 해석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개념이 동물적이거나 즉각적인 방어 기제로 체화되어있기만 하지 않고, 우리의 일상 속 습관과 의식, 그리고 제도 안에 철저히 스며들어 있음이 때때로 자율과 타율을 막론하고 환기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여기 죽음이라는 개념을 마주한 네 명의 작가가 있다. 이들은 전시라는 행위로 더욱 특별해지지만, 한 편으로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주체’가 되어 죽음에 대해 탐구하고 통찰해온 바를 표현하거나, 새삼스럽게 이 프로젝트로 인해 개념의 범주와 활용을 마주하게 되는 태도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흥미를 느낀 부분은, 각자의 작업이 죽음 개념에 천착되어온 것이 아니고 이번에 제안된 측면에 있어 어느 정도 주제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그간의 관성과 개성을 놓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정과 변화의 공존이야말로 살아 있는 채로 생과 사의 병존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두 번째로 흥미를 느낀 부분은 타이틀이다. ‘공동 선언’은 굉장히 묘한 개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거의 정치 외교 용어로 쓰이는 것이어서 아트 프로젝트에 이를 차용한 자체가 생경한데, 단어와 조합을 들여다보고 작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느 순간 이해가 간다. 우선 ‘공동’이라는 말은 ‘공통’과 달라서, 강력하게 꿰어졌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연대에 전제한다. ‘함께 하거나 관계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그 주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언급하려고 한다. ‘선언’ 역시 그간의 갈등을 봉합 짓는 기능으로 많이 쓰이나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숙제가 기다리고 있느냐를 반증하기도 하는 언어적 표상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음 공동 선언’은 사망 선고나 진단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이 개념을 느슨하게, 그리고 정신적 측면에 더 집중하게 함으로써 예술적 확장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상당히 정형화된 이미지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개인적 관념을 충돌시켜보기에 용이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혀 있는 개념이 아닌 호환성을 가진 주제로서 또다시 돌아온 ‘연말’이라는 종결의 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전환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앞서 유보해 둔 ‘공동’의 주체가 공중(公衆)이라는 점이다. 작가와 관객은 생각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화된 죽음을 끄집어내고 의식적으로 토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이 그렇듯, 죽음 역시 상대적으로 금기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당위이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글/ 배민영(예술평론가)
의지의 허상
최정은 <반복되는 타살> 평론
최정은 작가는 인간의 사고와 외부의 압력, 그리고 존재하는 관념을 각각 추, 전자발생기, 조명 등으로 가변 설치함으로써 물리적으로 비유하고, 추의 움직임을 통해 반복되는 타살로 인한 패턴을 표상한다. 작품명은 다름 아닌 ‘반복되는 타살’이다. 이는 죽음 그 자체뿐만 아니라 본 프로젝트가 하나의 과업assignmet으로서 작가에게 할당된 언어로서 그것이 아무리 자율적 선택을 전제로 하고 있어도 만나고 의식되는 순간 통제control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발전시켜 급기야 이것은 ‘타살’이며 심지어 ‘반복’되기까지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특히 작가는 “떠오르는 관념들을 죽여라.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감각적, 감성적 표상으로 돌아가라. 이 지시를 들은 순간 나는 돌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오늘날 ‘의지’와 ‘표상’이 근대와 비교해볼 때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를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세계는 단지 표상의 세계이고, 이는 결코 우리의 삶과 세계의 본질을 알려주지 않아 인간은 단지 이성으로 이를 파악할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면서 “세계의 진정한 본질은 의지이며, 인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사악한 마음이 생길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세계가 하나 된 기분을 느낀다.”고 기술했다. 이는 이성 중심의 철학사에 반기를 들고 이후 니체를 필두로 실존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근현대라는 압축된 시대를 거치며 ‘의지’라는 부분이 교조적인 색깔을 띠게 되고 새로운 이성의 형태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세계가 고도의 언어로 관념화됨으로써 이성은 표상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 ‘의지의 표상’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의지라는 감성적 표상을 이미 이성이라고 신봉하면서 생물로서든 사회적으로든 인식적으로든 죽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수많은 긍정의 당위와 지시 체계 속에 사실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간 신체에 대한 시각을 파격적인 이미지와 제의 등에의 비유를 통해 개성적인 관점을 보여 온 최정은 작가의 이번 작업을 보면, 물음표에서 시작해 물음표로 끝나는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작가가 자율 의지를 부정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전복은 ‘죽음의 긍정성’의 취지를 설명 혹은 제안하며 이번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입력된 순간부터 이에 저항함으로써 드디어 ‘떠오르는 관념들을 죽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조차도 이미 자율적으로 움직인 것도, 나아가 작가의 특별한 감각으로 아름답게 재현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연루된 생을 대하는 우리의 상당한 시간들처럼 중립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물리적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의도적 절제나 키네틱적 수사가 앞장서지 않고, 오히려 자연과 인위의 합체를 보여줌으로써 증명의 무의미함을 증명하는 흥미로움 정도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이러한 설치를 보며 사람들은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생각할 것이고, 이것은 이 전시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끝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생각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망각의 영역을 향해 구겨 던져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패러독스다. 여러분이 이 전시에 오고, 이 설치를 보고, 혹은 이 글을 읽은 순간 당신의 자율성은 그만큼 침해를 받게 되었으니까. 그 침해가 죽음의 지향성이라고 말한다면 그 의지는 얼마만큼 맹목적인지는 각자 판단할 사항이지만 이토록 의지라는 것은 허상이고, 그것은 앞으로도 우리 인생에 계속해서 출현할 것이다.
부재 증명의 역설
백다래 <내 삶을 소거하는 방법> 평론
백다래 작가는 스스로 얼굴에 이름을 쓰고, 손이 아닌 몸짓과 물의 압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작업을 한다. 이 행위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산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작가가 이름을 지워 죽음을 선사함과 동시에 자신을 소거erasure하는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기록하고 전시함으로써 또 다른 삶의 시작과 부활을 암시한다. 특히 작가는 여기서 “이름은 누군가를 정의하는 가장 명확한 의미”라고 전제하는데, 이는 정체성identity이라는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고, 필자는 이 주제와 관련해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명확한 의미’라는 전제도 함께 생각해볼 만하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은 다음에는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으니 점점 잊혀가고, 아주 유명하거나 역사적인 인물은 소위 박제가 되는 것이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명예로운 삶을 살고 시대가 지나도 기억될 만한 좋은 사람이 되라는 교훈적 의미로 학습되곤 하지만, 이는 저명성의 양면성을 생각할수록 참 섬뜩한 말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 히틀러는 ‘악의 화신’으로서 여전히 살아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 존재에게 이름이란 생명력vitality이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대 작가들에겐 이름의 불멸immortality보다는 현전성Anwesenheit 자체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금-여기’의 존재 증명을 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간다. 백다래 작가는 물리적 장소와 풍경에 자신을 하나의 오브젝트처럼 배치하고 촬영, 기록함으로써 존재 증명해오는데 능하며, 이번 작업에서는 그 안에 ‘소거’라는 부재 혹은 소멸의 방향성을 통해 역설적 증명을 시도한다.
먼저 영상 작업에서 물 위와 아래 두 개의 화면은 삶과 죽음을 은유하기도 한다. 화면 속 인물인 작가 자신은 그 두 개의 선을 반복하며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관객은 스스로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며 자신의 이름을 지워내는 모습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 또 다른 죽음의 단면을 엿본다. 물론 죽음과 관련한 행위는 그 자체로 죽음의 문턱처럼 숨이 차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수심이 깊진 않았지만, 물속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그것이 단순한 물놀이가 아닌 이름을 지우기 위해 얼굴에 물의 마찰을 최대한 일으켜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적으로 반복행위를 할 때 소모되는 체력과 정신력은 존재 자체가 소진되는 느낌이었을 터. 게다가 촬영 도중 갑자기 수영장에서 정체불명의 가스 냄새가 나 막판에는 재채기까지 해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다행히 가스 유출은 멈추었지만 이러한 돌발 상황 속에서 작가는 오히려 물속으로 도피를 하며 마치 생선처럼 그 안을 더 삶에 가까운 공간처럼 느끼게 되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렇듯 매 순간이 불분명하기에 매 순간 죽을 각오를 하고 산다. 이는 열심히 산다는 레토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죽을 각오다. 즉, 내가 한 순간에 없어져 이름만이 남을 수도 있음, 혹은 사회적으로 명예나 존재감이 없어질 수 있음, 이런 다양한 죽음 앞에 우리가 있음이다.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최종의 의식은 내가 없어짐으로써 비로소 존재가 증명될 것 같은 역설이다.
다섯 장의 사진 작업은 ‘명예’라는 측면에서 더욱 강력한 장치를 동원한다.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이 자신의 이름이 쓰인 얼굴에 물총을 쏴서 지워지게 하는 과정을 담은 것인데, 이는 다소 금기taboo를 건드린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를 통해 역설의 증명 능력은 분명히 배가되고, 이름이 가지고 있는 현전성조차 그것이 수단 또는 외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환기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박제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기록으로서 말이다.
합리성 앞에 분열하는 초자아
송주형 <나는 한 번도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평론
도시는 누가 뭐래도 합리성을 표방하는 공간이다. 적어도 이분법적으로 볼 때 자연에 가까운 시골에 대항하는 문명의 공간은 소수의 계획과 다수의 추종으로 건설된 운명의 제국을 ‘합리’라는 이름으로 끼워 넣는다. 역사는 항상 도시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에 골몰했고 그 과정에서 문명의 충돌과 화력 경쟁은 도시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문명의 죽음을 예고하기도 했지만, 정치와 행정은 여기에 인공호흡을 가했다. 20세기 중반 모두의 현대가 어설픈 합의를 선언하자 부동산 가치를 앞세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럭저럭 건재함을 알려왔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를 통해 서구적 합리 준거가 가진 허망함을 폭로했고, 이는 철학계에서 구조주의라는 사유방식을 개척하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자전적 여행기의 한계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위로가 될까 싶을 정도로 구조주의는 후대의 걸출한 사상가들의 계승과 여러 논고 속에서 공허해지는 역설적 한계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그는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ème)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말을 남겼다. “체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 전체인 반면 구조는 여러 집합에 공통적 원리이면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특징을 간파 혹은 그렇게 정의했다. 이는 “의식은 자신을 속인다”는 마르크스의 교훈이 레비-스트로스를 지나 무의식의 욕망을 이야기한 프로이트-라캉의 계보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나르시시즘-상상계, 반복강박-상징계, 근원적 억압-현실계라는 3원 구조가 그것이다.
자크 라캉의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고 하는 언어 결정주의는 도시의 삶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것은 계급을 정당화하며 ‘새로움’의 가치를 표준화한다. 정신적 측면이 물질적 측면에 복속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라캉의 욕망이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상징계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의 꿈인 상상을 넘어 욕망이 주체를 제압하고 죽음충동과 자기비난을 계속 하는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주이상스jouissance 단계에 들어서면서 주체는 병리적 현상의 객체로 죽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살게 된다.
송주형 작가가 <신도시>(2018)에서 “집은 우리 삶의 왜곡된 현실 구조를 상징하는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순환굴레와도 같다.”고 밝혀둔 작업노트를 먼저 소화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일면 사회비판적 성격도 띠지만 한편으로는 욕망에 대한 중립적 통찰을 지향하기도 한다. 상상계를 포기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온다는 라캉의 이론은 사실 상징계가 없으면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작가의 대상인 집과 도시는 체계가 아닌 구조로서 담아내고 있다. 즉,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채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구의 현대적 관점이 압도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였지만 결국은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도시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만을 남겨두고 있다. 제도 안에서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는 듯한 작가의 최근 작업 노트를 들추어보게 된다.
<소요유>(2020) 발표 당시 “의식을 배제하고 무위의 행동을 반복하는 수신(修身)의 방법으로 탈속하여 내적 성찰을 이루고, 나아가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마음과 정신의 해방을 얻은 ‘逍遙遊’의 단계를 지향한다.”는 송작가는 노자老子의 ‘무위이무불위無爲⽽無不爲’를 차용해 “무위를 위한 반복적인 행위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결과가 오히려 일정한 목적에 합치된다.”고 설명한다. 합리성 앞에 분열하는 문화적 초자아는 생업으로 단절되었던 작업을 시작하고 퍼티로 긁어내며 탈아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벗어나지 못한 도시의 삶을 무위와 반복강박으로 끌어안음으로서 ‘사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것’으로 치환하며 도시라는 구조의 무의미성이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게 한 것이다.
원래 없는 것으로부터
김유경 <무무명> 평론
‘없음’과 관련해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적 관점과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적 관점을 살짝 비교해보면, 서양은 ‘태초의 암흑’으로부터 신의 말oracle이 있어 빛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개념이라면, 동양은 ‘텅 비어 있음; 공空’ 또는 ‘무위無爲’를 지혜와 열반의 영역으로 본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있음’이 ‘없음’에 앞서는 반면 ‘없음’이 가진 인식의 가치에 실체적 의미를 부여한다. 서양에서도 청교도적 절제를 강조하기는 하나 노동의 신성성과 합당한 대가를 중요시하므로 아주 없는 것은 게으름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완전히 비우는 것에 대한 미학도 중시한다. <소유냐 존재냐>으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이 서양인이지만 랍비의 절제에 익숙한 가정환경이었던 데다 불교의 무소유 정신에까지 심취하게 되며 그러한 실존주의를 제언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동양의 ‘없음’은 상당한 정신적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空의 지혜는 자신을 죽이는 것이며, 이는 ‘생의 박탈’이라기보다는 ‘원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즉, 주체성이 ‘나’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인 서양과 달리 그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여 ‘무명無明’이라 하였다. 그 원전인 반야심경 일부를 옮기고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공[空] 그 자체에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음에서 늙고 죽음도 없고 또 늙어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느니라.
결국 실체성과 언어성을 없애는 과정이 지혜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하며, 그것을 “무무명無無明”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굳이 “밝음의 없음이 없음”이라고 직역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 느껴지는 ‘혼돈’으로 치환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이는 장자莊子가 “일곱 개의 구멍을 뚫자 죽었다.”고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김유경 작가에게 있어 무무명은 “시간에 따른 반복적인 행위의 이미지를 그리고 기호화하여 자유의지, 즉 순간순간 발현되는 죽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폭력과 상실에 대한 묵상으로서, 트라우마의 회귀를 통해 알게 됨과 거슬러 올라가 알게 됨은, 모두 알기의 어려움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듯 트라우마, 즉 죽음을 시각적으로 남기는 행위는 ‘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감상자들은 무겁게 그려나간 작업의 발묵법을 미적으로 은은하고 아름다운 명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각하기도 하며, 작가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반응에 대한 예상도 점점 내려놓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작업 역시 의미 있음이 의미 없게 되는데, 그 혼란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작가가 먹을 다루며 고통스럽고 예민하게 작업함으로써 그때그때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조차도 시각적 ‘아름다움’ 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동양화임을 알고 감상하지만 이미 우리의 눈은 서구화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구분 자체가 원래 없었던 것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죽음의 속성을 가진 것 아닐까. 이토록 이미 물성이 있는데 그것이 가진 空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무명과 무무명의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