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감이나 플라스틱 등 우리 일상에는 ‘고분자(polymer)’로 만든 재료가 많다. 특히 현대의 나노기술은 고분자의 자기조립 성질을 이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고분자를 재료로 쓸지 결정하는 목적으로 시뮬레이션을 활용하는데, 연결된 사슬구조를 가진 고분자의 특성상 복잡한 함수를 써서 오랜 시간 계산해야 했다. 그런데 최근 AI 기술을 써서 고분자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수행하는 방법이 나왔다.
김재업 물리학과 교수팀은 일주일 정도 소요되던 계산을 하루 안에 끝낼 수 있는 ‘AI 고분자 시뮬레이션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오픈소스 프로그램으로 공개돼 고분자 시뮬레이션 발전에 이바지할 전망이다.
고분자계의 통계물리학적 특성을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는 차세대 이론 도구로 ‘랑주뱅 장이론 시뮬레이션(Langevin Field Theoretic Simulation, L-FTS)이 개발돼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계산량이 너무 많아 고성능 GPU(그래픽 처리장치)를 사용해도 시뮬레이션 한 번에 며칠씩 걸렸다. 김재업 교수팀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학습을 제안했다.
L-FTS를 수행하려면 고분자의 비압축성(힘을 받아도 부피가 줄어들지 않는 성질)이 성립하는 지점을 찾는 작업을 수십만 번 이상 수행해야 한다. 기존에 쓰이던 반복법은 대략 예측한 값에서 실제 결과까지 거리를 계산해 예측치를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해 이 지점을 찾아냈는데, 한 번 찾을 때마다 예측 작업을 50회 정도 반복해야 했다.
김재업 교수팀은 AI 기술로 잘 알려진 딥러닝(Deep Learning)을 이용해 반복법의 단점을 해결했다. 인공신경망에 많은 데이터를 주고 훈련을 진행해 예측치를 더 정확하게 도출하게 만든 것이다. 이 기술을 쓰면 50회씩 반복하던 예측을 2~4회로 줄일 수 있어 기존보다 6배 이상 빠르게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수 있다. 인공신경망 훈련을 위한 데이터 준비와 훈련에 드는 시간을 포함해도 기존 대비 최소 4배 이상 속도가 향상됐다.
제1저자인 용대성 KIAS 연구원(UNIST 물리학과 박사 졸업)은 “지금까지는 작은 고분자계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수행됐던 ‘장이론 시뮬레이션’을 대면적 박막이나 복잡한 형상이 예상되는 고분자에도 사용할 길이 열렸다”고 연구의 의미를 짚었다.
이번 연구는 특히 ‘기계학습 기반의 시뮬레이션 방법의 한계로 지적됐던 낮은 정확도를 극복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최근 수치적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수행하기 위해 AI 분야의 기계학습을 이용한 해법이 많이 제안됐지만 대부분 정확도가 낮고 AI 훈련에 많은 시간이 요구됐다. 그런데 이번 연구는 이런 단점까지 극복한 것이다.
김재업 교수는 “이번 기술은 심층인공신경망이 예측한 답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예측치와 정답의 차이를 다시 계산해 새로운 입력값을 부여해 더 정밀한 예측이 가능하다”며 “이 덕분에 몇 번의 예측으로 원하는 수치적 정밀도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기존의 편미분 방정식이나 밀도 범함수 이론(DFT)의 해를 얻는 문제 등의 다양한 문제에 이 기술을 적용해볼 수 있어 여러 분야로 응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중견연구자지원사업과 기초연구실사업(BRL), 세종과학펠로우십의 지원으로 수행됐다. 연구 성과는 고분자 연구 권위지인 ‘매크로몰레큘스(Macromolecules)’에 8월 9일자로 출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