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춥다는 남극 한 지역의 역대 최저 기온은 영하 89.2℃. 수 분만에 인간의 눈, 코, 심지어 폐까지 얼어붙게 한다. 이런 곳에서 물을 공중에 흩뿌리면 그 자리에서 얼음으로 바뀌고 만다. 그런데 한 과학자가 영하 150℃에서 얼지 않은 물을 발견했다.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극저온 상태의 물이 20년 만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 발견의 주역, 김채운 UNIST 자연과학부 물리학과 교수를 만나봤다.
미지의 바다 위 항해를 시작하다
김 교수는 X선이 물질을 만나 간섭을 보이는 회절현상을 이용해 단백질의 구조를 분석해왔다. X선 회절은 물질의 구조를 원자 수준에서 파악할 때 유용하다. 그런데 단백질은 강력한 X선을 쬐면 손상되기 때문에, X-선 회절 실험을 위해서는 단백질 결정을 냉각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문제는 냉각할 때 단백질 결정 안에 있는 물도 같이 얼면서 부피가 팽창해 단백질 결정이 망가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글리세롤, 에틸렌글리콜 같은 저온보호물질을 첨가해 단백질 구조를 보존하면서 냉각시켜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단백질 종류마다 필요한 저온보호물질의 종류가 달라서 실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바이러스처럼 큰 구조의 거대 분자체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김 교수는 박사과정생이던 2004년에 이런 저온보호물질을 첨가하지 않고, 2000기압의 고압에서 손상 없이 단백질 결정을 냉각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당시 김 교수는 높은 압력에서 단백질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실험 도중 우연히 극저온에서도 결정구조를 이루지 않는 얼음을 발견했다. 김 교수는 단백질 결정 안에는 물이 상당히 많은데, 그 물이 고밀도의 비결정질 상태가 될 거라고 추측했다. 김 교수는 이 주제에 매진해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관련된 주제로 연구를 이어갔다.
고독한 항해 뒤에 남은 첫 발자국
‘영하 150℃에서도 얼지 않는 물’ 역시 그런 연구의 연장선에서 만들었다. 2009년, 김 교수는 2000기압에서 물을 영하 190℃까지 냉각해 고밀도 비결정질 상태의 얼음을 밝혀냈다. 그 뒤 압력을 대기압과 같은 1기압으로 낮추고 온도를 서서히 높여갔다. 그러자 영하 150℃에서 짧은 순간 액체상태의 물이 나타났다.
영하 150℃에서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한다는 신비한 현상을 보고도 근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김 교수는 혼자 속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홀로 이 분야를 개척하다시피했기에, 모르는 것들을 스스로 하나씩 배워나가야 했다.시간이 지나면서 실험 결과들을 설명할 근거들이 보다 명확해졌고, 김 교수는 자신이 봤던 것이 20여 년간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물의 비밀을 풀어줄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근 김 교수는 극저온에서 액체상태인 물의 동역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연구의 시작이었던 생물물리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 이산화탄소가 결합하는 탄산탈수효소 등 다양한 단백질의 특성을 연구하고 있고, 2014년에는 스스로 개발한 기법을 확장시켜 단백질보다 크기가 큰 박테리아의 구조를 X선으로 관찰했다.
김 교수는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다보니 학회를 가도 같은 주제로 얘기할 사람이 많이 없어 약간은 외롭기도 하다”며 “하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연구한다는 사실이 즐겁고 자부심도 느낀다”고 말했다.
[연구실 人사이드] 지도교수를 뛰어넘어라
김채운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길 바란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갖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도 철학이다.
“자신의 지식으로 일일이 간섭하고 알려주면 학생들이 교수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 놓은 지식의 틀에 갇히고 만다”며 “분야에 구분을 두지 않고 궁금한 것들을 능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려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UNIST에 온 이유도 교수들 간에, 교수와 학생들간에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때문이다.
서동준 과학동아 기자 | bios@donga.com
<본 기사는 2016년 2월 ‘과학동아’에 ‘‘영하 150℃에서 찰랑이는 물 보셨나요?”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