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새해가 밝았다. 필자가 십수년간 새해마다 접하는 소식으로, 어김없이 올해도 ‘경제위기’요 ‘불황’이다. 해결책도 너무 뻔한 ‘체질개선’이고, ‘기업혁신’이다. 워낙 일상적인 구호가 되다보니 이제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S그룹 회장님의 말씀조차 새롭지않다. 하지만 팩트는 팩트다.
한 글로벌 컨설팅기업의 조사에 따르면 한 기업이 50년 이상 존속하는 비율이 절반도 안된다고 한다. 또 최근일수록 기업의 50년 생존율은 급격히 낮아지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들도 주 사업영역이 바뀐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 지표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요즈음 미디어들은 기존 영역을 없애버리고 새 사업으로 중심을 옮겨가며 생존하는 기업을 성공사례로 곧잘 소개한다. 전문가들은 그런 기업들의 ‘이름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꾼’ 경영 마인드를 본받자며 찬사를 보낸다. 대표적 성공사례로 GE가 있다. 사실 GE(제네럴일렉트릭)는 우리 모두가 잘아는 발명의 아버지 토머스 에디슨이 1892년에 만든 120년 넘은 제조기업이다. 최근 가전부문을 중국 하이얼에 일괄 매각하고 지금은 금융과 컨설팅 등에 주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해 가전부문을 매각한 시퀀스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기업이 생존하는 영역변신의 혁신적 성공사례로 손꼽힐지도 모른다. 정말 이름 빼고 다 바꾼 케이스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일일까? 고유의 주력사업을 과감히 접거나 바꿀 때 우리는 결단과 혁신이라는 대의적 면을 보고 박수 치지만 그 변화의 디테일을 보는데에는 소홀하다. 한 예로 구성원의 변화를 보면 앞서 언급한 GE가 소비자가전제품을 주 사업영역으로 두고 있었을 때의 임직원들이, 금융과 컨설팅 위주인 현재의 GE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을까? 아마 99%는 직장을 잃거나 다른 기업으로 이직했을 것이다. 현재의 GE는 이전과 전혀 다른 금융, 컨설팅 영역의 임직원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이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구성원과 성격, 체질이 다 바뀐 것인데, 이것을 100년 넘게 존속하는 기업의 성공 사례라며 박수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더더욱 기업을 단순한 이윤추구의 집단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책임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는 현대사회에서 말이다. 뼈를 깎는 실직의 고통과 이직의 스트레스, 기업을 재구성하는 엄청난 시간적, 물질적 소요를 감당하면서까지 사명의 의미와 동떨어진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대체 누구에게 어떤 좋은 의미가 되길래 그리 호들갑인가?
우리는 정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 이름만 그대로 둔 채 말과 행동을 모두 바꾸면 과연 그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나를 정의하고 구분 짓는 고유한 속성이 이름뿐인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모습, 마음, 말과 행동이 모두 나를 구성하는 고유한 속성, 즉 정체성이다. 이름만 대한민국이고,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이 송두리째 바뀐다면 그 나라를 대한민국이라 부를 수 없다. 시대를 관통하며 존재해 온 우리 모습이 곧 대한민국 정체성의 주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자기본질을 잃지 않을 때 발전하고 융합할 수 있다. 그것은 기본기를 다지고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옛말도 있지 않나.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잘 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 누구보다도 잘 할 줄 아는 것, 제일 자신 있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요, 경쟁력의 밑천이다.
과거 필자가 영국브랜드 벤틀리에서 일할 때 디렉터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필자의 디자인 제안이 ‘영국스러움’과 ‘벤틀리다움’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였다. 자기정체성을 강하게 띠는 것이 곧 경쟁력이라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주문이 밀려 못 파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니까 말이다. 다만 시대변화까지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온 세상 자동차가 전기차로 바뀌는 이 시대에, 새 주유소자리를 알아보는 바보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1월 18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About Identity, 우리 회사는 무슨 회사? 나는 누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