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에 학회 발표가 있어 네덜란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전에 가본 유럽 도시라고는 프라하 밖에 없는데, 헤이그나 암스테르담에선 프라하에서 느꼈던 고풍스러운 유럽은 느끼진 못했다. 오히려 미국스러웠고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풍차나 튤립을 빈번하게 만나지는 못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16세기말 스페인(합스부르크 에스파냐)으로부터의 독립전쟁 이후 시작됐다. 17세기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상, 문학, 예술 과학 등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7세기 후반 영국에 밀리기 시작하기 전까지 유럽 제1의 경제선진국이었다. 미국 뉴욕시의 원래 이름이 뉴암스테르담이었다는 것은 네덜란드의 옛 제국주의적 실체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황금기란 말은 경제적 가치 평가 아닌 예술 특히 그림에 대해 붙은말이다. 빛의 화가 램브란트, 페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그 전성기를 웅변한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네덜란드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두 약자의 죽음이었다.
그 첫 번째 죽음은 헤이그 차이나타운 근처 옛 De Jong 호텔에 자리잡은 이준열사기념관에서 만났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 제국주의가 외교권을 앗아간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불법성과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대한제국 고종 황제 밀명을 받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특사는 두 달 남짓 여정 끝에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했다. 먼저 성명서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러시아 및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 그리고 네덜란드 장관에게 참석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한다. 열강들은 오히려 밀사 존재를 일본에게 통보했다. 제국주의 카르텔이 약소국을 돌 볼 이유가 있었겠는가? 불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했던 이위종이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세계 각국의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뿐, 실제적인 외교적 성과는 전무했다.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이었던 이위종은 먼저 상트페테부르크로 떠났고, 이틀 뒤인 7월 14일 이준은 사망 했다. 나는 이준 열사가 배를 가르고 자살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와 전태일 열사 이미지는 얼추 겹치는 방식으로 뇌세포에 각인 돼 있었다. 그런데 1956년과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이준의 사인에 대한 결론은 울화병(憤死)이었다. 할복자살은 대한매일신보의 의도적 오보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점심경의 이준열사기념관은 분빌 정도는 아니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꾸준한 발길이 이어졌다. 1시간 정도 둘러보는 동안 약 40명 가량의 방문객이 입장을 했으며, 모두 우리 관광객이었다.
두번째 죽음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만났다. 1시간 남짓 줄서기 끝에 입장을 할 수 있었다. 이준의 죽음과는 달리 안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1933년 히틀러가 유대인을 탄압하자 식구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1940년에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게 되고, 마침내 오토는 1942년 7월 6일 식구를 데리고 경영하던 공장 건물의 뒤 편을 비밀 별채로 만들어 은신한다. 2년 남짓의 은신은 누군가의 밀고로 끝이 나고 아버지 오토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종전 직전에 수용소에서 모두 사망한다. 기념품점엔 안네 프랑크의 다양한 판본이 세계각국의 언어로 전시 돼 있었다. 우리말본을 발견한 반가움 곁엔 더욱 다양한 판본이 구비 돼 있는 일본어 번역본의 역겨움이 함께 했다.
독일은 후발 산업혁명국으로서 19세기 말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에 뒤늦게 합류했다. 후발 주자에게 돌아갈 파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기존 영국, 프랑스 세력과 권력 공백 지역에서 대립했다. 이러한 갈등은 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했고,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혼란은 히틀러 나찌 독재로 이어진다. 나찌의 제국주의는 극우민족주의와 결탁해 유대인과 집시 등의 소수 민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인종 청소를 단행했다.
안네 프랑크 일기의 일본어 번역본을 마주 했을 때 치미는 역겨움은 아마도 자신의 제국주의적 반인류행위는 망각한 채, 버젓이 다른 제국주의의 희생자를 기리는 꼴불견에 내 몸이 반응한 것이리라. 고인이 되신 위안부 할머니 강덕경과 안네는 29년생 동갑나기란 말이다!
현 정부가 국정역사교과서를 폐지한 것과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경화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지한 것은 대한민국이 1919년에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믿는’이 아니라) 필자에게는 매우 상쾌한 일이었다. 시민의 촛불이 만든 민주적 상식적 공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제 강점기와 군부 독재를 포함한 근현대사의 민낯 직시하기와 마땅히 인정을 받아야 할 그러나 외면됐던 국가 적통 바로 세우기가 아닐까 한다. 관은 제어하려 들지 말고 지원만 할 지니. 촛불 정부가 인류보편적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외교적인 숙제들을 잘 해결하길 바란다. 위안부 문제는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이지만, 베트남전 양민 학살 문제는 사과해야 할 일이다.
송현곤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7월 5일 울산매일신문 17면에 ‘[시론 칼럼] 네덜란드서 마주한 두 약자의 죽음, 이준과 안네’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