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핑계란 자신의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기 위한 변명을 뜻한다. 공학을 전공한 필자는 학문의 목적과 목표가 진실이 진실임을 찾아 알리고 이를 응용하여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신념에 점차 회의를 느끼게 되는 일이 자주 생긴다.
한 때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면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주역들은 거짓이었음이 명확한데 아직도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사과하지 않는다. 국민을 그토록 현혹했으면서도 변명조차 없다. 차라리 핑계라도 대면 피식하고 한번 웃어주며 “그래도 잘못한 줄은 아네”라고 넘어가고 싶건만.
핵공격을 막기위해 사드(THAAD)를 배치할 때도 전파가 너무 강해서 인간에게 해롭다는 주장과 안전하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정부의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갈등을 겪었으나 결국은 설치되었고 그 이후에는 유해성 여부의 논쟁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진실은 무엇인가? 과학기술은 한쪽 측면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환경이 다르고 시간적으로도 다르게 되므로 장기간의 시간적 통계와 환경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이 결합되어야만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며 그러한 진실은 특수한 환경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편적인 면만으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면 오류가 생기므로 다차원적이고 다각적인 연구 결과를 종합하고 판단하는 전문가들의 결론을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아직도 원인을 제공한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감염 현상에 매몰되어 국민들만 마스크 쓰기, 거리두기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힘들고 고된 현장에 내몰리는 것은 의료진들이고 아픈 환자들이다. 14세기에 유럽인구의 30~40%를 몰살시킨 페스트는 19세기 말에 파스퇴르에 의해 치료법이 개발되어 이제는 안심하는 세상이 되었다. 자그마치 5세기에 걸친 인류의 재앙이었다. 이 때에도 확산의 원인은 사람들의 군집이었다. 과학기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치료한다는 집회를 가진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다 알 것이다. 외부와 차단된 청정지역이라면 집합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바이러스가 눈에 보인다면 모르나 보이지도 않고, 공기를 통해 전염 가능성이 있다면 숨을 참지 않고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실체를 파악하고 분석하며 대응책을 강구하는 연구에 집중해서 백신을 개발하였고 이제는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진실 혹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은 물론 현상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인들이다. 올해 중반부터는 그리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단편적 지식을 가지고 남의 탓만 하고 있는 군상들이 너무 많다. 핑계는 그만두고, 조용히 자신의 현실에서 충실하게 방역수칙 지키며 일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남의 핑계나 대고 나도 열심히 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사실적 기록만 잘 하면 훗날 무엇이 진실이었고 무엇이 거짓이었는지 종합적으로 명명백백하게 판가름이 난다.
사실로 확정되지 않은 가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행위는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시대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보고 판단하면 되는 일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명확하지도 않은 지식을 가지고 핑계를 대는 행동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불교에서는 삼독(三毒)이라 하는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가 있다. 이 중 우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국민은 주권자이므로 어리석지 않게 진실과 거짓을 종합적으로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어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을 가까이 하는 주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 후손들에게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김학선 UN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 미래차연구소장
<본 칼럼은 2021년 1월 15일 경상일보 18면 ‘[경상시론]진실과 거짓의 혼돈’ 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