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엘런머스크가 테슬라의 비트코인 결제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설왕설래가 많다. 엘런머스크가 직접 밝힌 이유는 비트코인이 테슬라의 철학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트코인 채굴에 드는 지구적 에너지 낭비를 지적했다. 전세계에 오직 비트코인 채굴을 목적으로 가동 중인 컴퓨터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물리적 자원 낭비는 둘째 치고, 전력 사용량이 아르헨티나 전체 사용량 보다 높다. 비트코인을 국가라 가정하면 세계 상위 30위권 에너지 소비국이다. 묻지마식 영리추구에 지구적 자원을 낭비하는 비트코인의 민낯이다. 친환경 에너지 전환과 인류 삶의 증진이라는 테슬라의 슬로건에 위배된다.
비트코인 광풍, 암호화 화폐 열풍에 던지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이름도 낯선, 무슨 코인 대부분은 해당 가치가 어떻게 오르고 내리는지 잘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다. 기업 가치를 높이는 착한 노력이 투명하게 보이는 상장 시장과는 딴판이다. 암호화 화폐 거래의 배경이 어떻든 그저 돈 많이 벌면 그만인가? 수단의 선악을 생각해 볼 문제다.
테슬라가 불을 당겨 전세계 자동차 기업이 뛰어든 전기차 유행도, 화석 연료로부터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선한 목적에 동력을 얻는다. 자동차 기업들의 ‘선한 경쟁’은 제조 부품 원재료에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제 심지어 차량제조에 쓰이는 전기의 출처까지 청정에너지인가 아닌가를 논하고 있다.
탄소배출을 줄여 지구온난화를 늦추려는 전세계의 노력 또한 선한 태도다. 나라마다 입장이 다름에도 기후변화 협약과 탄소세 도입을 지지하는 이유는 목적과 수단의 ‘착함’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국제무역에 탄소세 제도가 시행되면 이제 친환경 소재와 친환경 공정으로 생산한 제품이 아니면 수출도 어렵다. 우리 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큰 번거로움이지만,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착한 태도를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 일상에서 생활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같다. 손 많이 가는 재활용품 분리배출 뿐 아니라 비닐봉투 대신 에코백을 들고, 일회용컵 대신 개인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사용하는 우리의 태도는 예쁘다. 지구를 위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착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사회적 이슈, 학폭 미투 또한 마찬가지다. 유명 연예인이 학창시절 학교 폭력 전력으로 중도 하차하고, 스포츠 스타는 청소년 시절 일진 논란으로 제명당했다. 아무리 인기 많고 성공해도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과정이나 절차의 ‘선함’이 문제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천지개벽이다. ‘라떼는 말이야’를 소환해 보면 초·중·고교는 물론 군대, 대학시절, 직장까지 만연했던 ‘폭력의 추억’은 목적 달성을 위한 대수롭지 않은 수단 정도였으니까.
이렇듯 수단이나 과정에 선함과 공정성을 묻는 ‘태도의 변화’는 우리 삶을 바꾸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이나 평가, 공개경쟁 입찰제도, 연구노트 작성은 모두 절차적 정당성을 객관적으로 획득하는 수단이다. 앞서 이야기한 친환경적 움직임과 함께, 온세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하며 발전하고 있다.
지적하고 싶은 딱하나, 절차적 정당성만 고집해도 안 된다는 점이다. 혹시 우리 집에 에코백이 몇개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머그컵이나 텀블러는 또 얼마나 많은가? 온갖 판촉이나 행사 때마다 친환경 의식을 고무하며 나누어 주고 받아오는 에코백, 머그컵, 텀블러들이 오히려 자원낭비며 환경파괴일 수 있다. 학력, 경력 다가려 놓고 타 부서위원들이 평가하는 희한한 블라인드 채용은 인재 뽑기의 최대 난관이다. 그렇게 지켜지는 절차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공사, 구매에도 입찰이라는 절차는 복병이다. 최저가 입찰, 역량과 무관한 평가는 종종 배를 산으로 가게 만든다. 친환경 분야 연구과제에 수많은 종이 연구 노트 제출을 강제하는 현실은 참 웃프다.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할 때, 궁극의 목적을 떠올린다면 아무도 나몰라라 할 수 없을텐데. 지혜로운 태도는 목적과 수단의 조화다.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5월 18일 경상일보 15면 ‘[정연우칼럼] 태도의 변화(Trans Attitute)’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