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아이디어를 창조해 내고 마는 ‘마음의 상태’를 과학이라고 아인슈타인은 정의했다. 과학을 마음의 상태로 이해한 것은 의외지만 혜안이 고맙기만 하다. 전문가의 과학만 과학이라 치부되는 시대라서 더욱 그렇다.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과학은 있었으니 존재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 과학이다. ‘존재의 기원’을 수학이, ‘존재의 본질’을 철학이 담당하는 것과 대비된다. 정리하면 과학은 존재의 관계를 통해 개념과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는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좀더 확장해 보면 존재의 관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칸트는 정리해 두었는데, 인과관계, 조건관계, 맞물린 관계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했다. 지진과 인과관계인 원전 사고로 오염수가 생겼고 일본 정부는 자국법과 국제법 테두리에서 처리해 바다로 방류하기로 결정했다. 대양에서 희석되기는 하지만 오염수와 만나게 되는 부산 자갈치시장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와 인과관계가 된다. 인과관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진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만약 후쿠시마에 원전을 짓지 않았다면, 또 일본 정부가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자갈치시장은 여러 조건이 충족되고 맞물려 원전 오염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즉 조건관계와 맞물린 관계가 지진과 합쳐졌다.
자연 생태 속 세 가지 관계를 다루는 모든 개념은 칸트와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과학이었다. 조건관계 중 하나일 뿐인 원전 오염수 내 오염물질 방류 기준 운운하며 국제법이 대양 생태계 안전을 보장한다는 주장은 정치일 뿐 과학일 수 없다. 평생 과학을 연구한 전문 과학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정책 전문 과학자’일 뿐이다. 전문지식을 이용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비과학적이라는 오명을 받아 괴담이 된다. 원전 오염수에 대해 생길 모든 가능성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념화해도 ‘비과학적 괴담’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버린다.
다른 예도 있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고통받고 사망한 피해자의 원인관계를 백신에서 찾으려 하면 백신 개발 회사는 물론 정부까지 나서서 과학적 인과관계가 없다고 한다. 최근 철근 매듭이 제대로 시공되지 않은 무량판 기둥을 가진 아파트에 대해서는 시공 시방서 등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이들은 엄청난 정신적 피해까지 겪고 있는 주민들에게 건물 구조역학과 관련 법을 내세울 것이 자명해 보인다. 인과관계로 포장된 관련 법을 내세운 과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연결돼 있다는 ‘생태’란 철학은 그 자체로 엄밀한 과학이다. 그래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마실 수 있고 해산물이 법적으로 안전하다는 누군가의 편집증적 사실보다는 인과, 조건, 맞물린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대중이 과학 기본에 충실한 진정한 과학자다.
마찬가지로 백신 피해자, 철근 누락 아파트 피해자들의 고통과 함께할 때 지극한 과학이 발생한다. 누가 누구에게 비과학적 괴담이란 오명과 무지를 말하고 있는지 답답한 마음에 칸트와 아인슈타인까지 모셔 와 항변해 본다.
<본 칼럼은 2023년 8월 25일 서울신문“[조재원의 에코 사이언스] 대중이 진정한 의미의 과학자”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