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르사아나사’(Sirsasna; 머리 서기)라는 요가 자세가 있다. 손깍지를 낀 채 팔을 바닥에 댄 후 정수리를 깍지 낀 손 사이에 놓고 몸을 지탱하여 물구나무를 서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보통 일 년 이상 요가를 해온 사람이 아니면 하기 어렵다. 갑자기 다리를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 올리다가는 균형을 잃고 우당탕 넘어질 수 있다. 천천히 몸의 균형을 잡아야 하기에 다리 뒤쪽의 유연성, 그리고 어깨와 배의 강인한 근력이 요구된다.
이 자세에 성공한다면, 매일 바닥을 딛고 있던 내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신묘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설사 거꾸로 서기 자세에 성공했다 해도 그 상태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호흡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다리를 다시 내릴 때도 서서히 내려와야 한다. 내 몸이 준비될 때까지 수련하지 않고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필자는 내 몸인데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시르사아사나를 시도하면서 알게 됐다.
내가 혼자 열심히 시도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 일들은 많이 있다. 그러면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필자가 오래 전 인천의 덕적도에서 석사 논문을 위한 현지 조사를 하던 때였다. 작은 섬 마을인 소야리의 한 부둣가에서 마을 주민들이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노인이 같이 만나서 가려고 했던 친구가 아직 오지 않자, 왜 이리 안 오느냐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다른 노인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놀려댔다. 덕적도 사람들이 ‘곁말’이라고 부르는 한 폭의 언어 예술을 여기 소개한다.
‘아 오늘 못 가면 내일 가지, 모래가 타나, 돌이 크나, 소금이 쉬어, 바닷물이 줄어, 세월이 좀먹어, 소털 같은 세상에, 왜 그리 바빠’
이처럼 나 혼자 서두른다고 해서 모든 일이 성사되는 게 아니므로, 오늘 안되면 내일 되겠지, 하며 여유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다림이 단순히 순리에 따르는 인내만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부당한 감옥 생활 속에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무려 19년 동안 나갈 준비를 한 끝에 탈옥한다. 이 영화는 기다림이란 단순히 인내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희망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기다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특히 빠른 변화가 절실한 순간일수록 더 그렇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서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더디고, 때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마치 3월의 꽃샘추위가 봄의 문턱을 막아서는 것처럼. 그러나 봄은 결국 온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느릴 뿐이다. 자연의 변화도, 사회의 변화도 제각기 때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모두 오랜 기다림의 시간 끝에 이뤄졌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성급함이 아니라 신중한 기다림에서 나온다.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사회는 ‘전환기’(liminality)를 거치며 새로운 상태로 변화한다고 보았다. 이 전환기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간 단계’이다. 마치 아이도 성인도 아닌 모호한 상태에서 통과 의례를 거쳐 성인이 되는 것처럼, 사회도 변화의 길목에서 불확실성과 혼란을 경험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불확실성도 이러한 전환기의 일부일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남들도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을 겪고 있다는 것에서 실존적 위안을 얻는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가 겪고 있는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이겨나가길 바란다. 긴 겨울에 지쳐 체념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차분히 다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본 칼럼은 2025년 3월 19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20)]기다림”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