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말부터 챗GPT의 대중적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Prompt Engineering)도 덩달아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에게 원하는 작업을 수행하도록 지시하는 문장 또는 질문을 작성하는 과정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고 한다.
보통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은 학습한 패턴을 기반으로 사용자가 입력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성한다. 입력이 항상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 값에 최대한 가까워지도록 입력을 계속해서 수정하고 다듬어야 한다. 비교적 새로운 분야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앞으로 지속 가능할지, 반짝 유행에 그치고 말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
하지만 적어도 일반 대중도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교육 전문가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원하는 결과를 얻고 양질의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정작 질문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교육 현장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교육 방식에 갇혀 있다. ‘질문 많은 학생’은 여전히 시간을 잡아먹거나 선생님을 귀찮게 하는 ‘방해자’로 간주된다. 질문은 지식을 확장하는 통로가 아니라, 교사의 부담을 늘리는 골칫거리일 뿐이다.
필자가 아는 한 교수의 자녀는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질문을 하자, ‘하라는 시험 공부는 안 하고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 학생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같이 대입 수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과학적 호기심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질문을 거부하는 현상은 교육 현장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정치 현장을 보면, 질문이야말로 정치 지도자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문화는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기자 회견, 특정 언론의 질문은 받지 않거나 무시하기, 그리고 더 나아가 특정 언론사 기자에게 폭력을 사용하기 등으로 점철되고 있다. 기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정보 수집을 위해 인터뷰 질문을 하는 것이며, 질문을 받는 사람은 할 수 있는 만큼 답을 하면 될 것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인간이 아니라 생성형 인공지능에게 인터뷰 질문을 하는 게 낫겠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그런데 대체 질문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한국 사회에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종종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된다. 윗사람에게 묻는 것은 예의가 없음이며,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복종의 결여다. 이런 문화에서는 ‘좋은 질문’이란 찾을 수 없으며, 대신 ‘침묵 혹은 정해진 답만 말하기’가 사회적 미덕으로 작동한다.
둘째, 질문을 하는 사람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감히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라고 하며 상대방을 적대시하기도 한다. 셋째, 질문은 원래 권력자를 불편하게 한다. 질문은 감춰진 진실을 끄집어내고, 무능을 드러내며, 책임을 묻는다. 그래서 질문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은, 단순히 질문이 억압되는 문화만이 아니라 정치의 무능이 드러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질문을 거부하는 교사, 상사, 관료, 정치 지도자 등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거의 권위주의 문화를 답습할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질문하는 역량을 교육해야 하고, 정치인들은 질문받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언론은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하고, 시민은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대중적인 생성형 인공지능 사용의 목적이 고작해야 ‘내 사진을 지브리 화풍으로 바꿔줘’ 정도의 요구를 하는 것에 그친다면 인류 문명의 발전은 딱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본 칼럼은 2025년 4월 23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21)]질문 금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