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동아일보 초대석 코너에 조무제 UNIST 총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UNIST 과기원 전환법’이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김상연 동아사이언스 전문기자가 본격 추진한 만남이다.
5일 오후 4시, 서울 용산구 동아사이언스 7층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조 총장이 UNIST를 설립하면서 품었던 비전과 그간의 에피소드들이 소개됐다. 기사에서는 2년 반을 끌었던 ‘UNIST 과기원 전환법’부터 2030년까지 세계 10위권 대학이 되겠다는 UNIST의 목표까지 폭넓게 다뤄졌다.
<아래는 기사 전문>
“8년 전 취임사에서 ‘UNIST를 한국의 MIT(미국 매사추세츠공대)로 만들겠다’고 하자 모두가 웃었죠. 사실 저도 선언적인 의미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대학이 MIT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꿈만은 아니라는 거죠.”
8월 퇴임을 앞둔 조무제 UNIST(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대) 총장(71)에게 꿈을 물어보자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8년 전인 2007년 울산의 허허벌판에 들어선 UNIST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뒤 연임하면서 UNIST를 명문대 반열로 끌어올린 조 총장. 그는 최근 마음 속 마지막 숙원을 마침내 풀었다.
– 숙원이 무엇이었나.
“3일 국회에서 ‘울산과학기술원(과기원) 전환법’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UNIST는 이르면 7월 국립대에서 과기원으로 체제가 바뀐다.”
– 과기원 전환이 숙원이 될 정도로 중요했나.
“오늘(5일) 학교에서 전·현직 학생회장들이 모여 축하의 의미로 학교 연못에 빠지는 ‘입수’ 행사를 했다. 그만큼 과기원 전환이 주는 자부심이 남다르다. 무엇보다 국가의 지원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어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갖출 수 있다. 당장은 병역특례 혜택을 받는 대학원 인원이 늘어나 우수한 대학원생 유치에 도움이 된다.”
과학기술원은 정부가 과학기술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한 연구중심대학으로 현재 대전의 KAIST, 광주의 GIST, 대구의 DGIST 등 3곳이 있다.
– 전환이 쉽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18대 국회에서도 법이 상정됐지만 무산됐다.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했다. 3일 국회 법사위에 올라온 법안 중 과기원 전환법이 15번째였다. 그런데 14번째 법안이 이른바 ‘김영란법’이었다. 또 안 되나 싶었는데 오후 5시에 겨우 통과됐다. 너무 신경을 썼는지 그동안 한 번도 감기몸살로 결근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감기로 목이 쉬었다.”
그는 경상대 생화학과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연구 환경이 열악한 지방대였지만 제자 한 명이 박사학위 논문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하는 등 뛰어난 연구 성과를 거듭 내놓아 과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키운 제자 16명이 현재 교수로 일하고 있다.
– 경상대 교수 시절에도 의욕적이었나.
“처음엔 무기력에 빠져 바둑만 엄청 뒀다. 아마 초단까지 올라가더라. 그러다 미국에서 ‘재조합 DNA’라는 생명공학 첨단기술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처음엔 연구비가 없어 사재 2000만 원을 털어 연구 장비를 샀다. 당시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 살 돈이었다. 힘들었지만 하나하나 해보니 되더라. 식물 유전공학 분야에선 우리가 최고가 됐다. 그래서 난 늘 ‘시도하고 실패하라(try and fail)’고 말한다.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 UNIST 초대 총장으로 부임했을 때 정작 첫 삽도 안 떴다고 하던데….
“총장 임명받은 날짜가 2007년 9월 1일이다. 기사나 비서도 없이 바로 울산으로 내려갔다. 택시를 타고 대학교 지을 터를 보러 갔더니 이주를 거부하던 토박이 농민들이 토지보상비 인상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다. 다행히 해결이 잘됐고 두 달 뒤 그곳에서 기공식과 취임식을 같이 했다. 그날 취임식에서 ‘한국의 MIT가 되겠다, 글로벌 10대 대학이 되겠다’고 선언한 거다.”
– 당시 글로벌 100위 안에 든 대학조차 국내에는 없었다.
“날 이상하게 봤을 거다. 울산시나 정부나 처음 목표는 보통 국립대였다. 그러나 내 비전은 달랐다. 울산은 한국의 산업수도다. 이런 곳에서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환갑을 넘었는데 마지막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소신 있게 일을 추진했다.”
– 개교 첫 해부터 우수 학생을 많이 유치해 화제가 됐다.
“대학은 좋은 교수 있으면 좋은 학생 오고 좋은 학생 있으면 좋은 교수 온다. 먼저 미국 최고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유학생과 한국인 과학자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열었다. 아직 건물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었다. 그래서 500원짜리 동전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줬다는 고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다행히 내 과거 성과가 진정성을 보여줬던 것 같다. 내 비전을 믿고 오겠다는 몇 명을 교수 명단에 넣고 이번에는 전국 21개 과학고를 모두 돌아다녔다. 작년에도 7∼8개는 다녔다. 종로 중앙 대성학원 등 유명 재수학원까지 찾아갔다. 대학총장이라는 자존심 다 버리고 다녔다(조 총장은 이 대목에서는 과거 일이 떠올랐는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UNIST에 내 혼을 바쳤다. 두어 번 다른 자리에 오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 첫해 신입생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
“다행히 과학고 등 특목고 학생이 전체의 35%였다. 다들 전국 상위 3% 안에 들었다. 지금은 2∼2.5% 되는 학생들이 들어온다. 원래 우리 학교의 정원은 1000명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첫해부터 그만큼이나 좋은 학생들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500명만 받겠다고 했다. 정부는 난색을 표했지만 설득했다.”
– 정부 생각과 달랐으니 갈등이 많았겠다.
“당연히 담당 부처는 부정적이었다. 이미 법까지 통과하고 예산 편성까지 끝난 상황이었으니까. 2008년 예산이 61억 원이었다. 그 돈으론 어림도 없었다. 취임하고 12월까지 이틀에 한 번씩 국회를 갔다. 결국 250억 원으로 예산을 증액했다. 전액을 최첨단 연구장비를 사는 데 썼다. 생각보다 내부 갈등은 크지 않았다. 교수 한명 한명을 내가 뽑았으니 처음부터 비전 공유가 잘됐다. 그랬기 때문에 성공한 제도가 ‘100% 영어강의’다.”
– 100% 영어강의가 그렇게 중요한가.
“처음에 모델로 삼은 4개 대학 중 하나가 홍콩과기대다. 홍콩과기대 총장을 만났더니 글로벌 대학을 만들려면 반드시 100% 영어강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조건 했다. 지금 우리 대학 학부생 정원이 3000명인데 외국인 학생이 29개국 200명(6.7%)이나 된다. 앞으로 외국인 학생과 교수를 전체의 20%로 만들려고 한다.”
– 외국인 학생 중 선호하는 나라가 있나.
“자원부국이다. 카자흐스탄 가나 같은 나라가 대표적이다. 현재 카자흐스탄 유학생이 54명으로 매년 지원자가 60명을 넘는다. 모두 그 나라에서 0.3% 안에 드는 우수한 학생들이다. 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한국 자원외교에 큰 힘이 될 것이다. 100% 영어강의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이 못 왔다.”
– 학교에서 많이 자랑하는 게 외국인 교수들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최고 수준의 과학자라며 뽑은 연구단장 22명 중 외국인이 3명이고 이 중 2명이 UNIST에 있다.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교수로 있다가 2013년 UNIST에 온 로드니 루오프 자연과학부 교수(다차원탄소재료 연구단장)는 2011년 세계 재료과학자 100인 중 16위에 선정됐다.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장에 선정된 스티브 그래닉 자연과학부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대 재료공학과 석좌교수 출신이다. 더구나 이들은 미국 대학을 사직하고 UNIST 교수로 옮겨 왔다.”
IBS 연구단장은 현재 KAIST와 포스텍이 4명씩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와 UNIST가 그 다음으로 3명씩이다.
– 이런 해외 과학자들을 유치한 비결이 무엇인가.
“대학의 글로벌화이다. 첨단 실험 장비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연구비를 보장한 것도 중요하다. 개개인에 맞춘 전략도 있었다. 두 사람 다 부인이 아시아계다. 사람을 데려올 때는 열과 성을 다한다. 한양대에서 조재필 친환경에너지공학부 교수를 데려올 때도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세 번이나 찾아가는 삼고초려를 했다. 조 교수는 우리 학교에 와서 충전시간이 짧은 리튬 2차전지를 개발했고 대학기술 이전료로는 최고인 54억 원을 받았다. 연구비도 수백억 원을 확보했다.”
– 2030년까지 글로벌 10대 대학이 될 수 있나.
“모든 분야에서 1등 할 수는 없다. 난 첫해부터 차세대에너지와 첨단 신소재에 집중하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2차전지 분야는 우리 학교가 MIT, 스탠퍼드대와 더불어 세계 3위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학 신소재 분야도 세계 20위권에 든다. 나노바이오 연구도 기대가 크다. 이런 속도로만 가면 2030년 글로벌 10대 대학도 가능하다고 본다. 처음엔 동기 부여였지만 지금은 실행 가능한 목표다. 우수한 교수들을 계속 데려와야 한다. 내년 말 2000억 원을 들여 짓고 있는 첨단연구동이 완공되면 연구 여건이 훨씬 좋아진다.”
– 연구성과 외에도 UNIST가 자랑할 만한 교육방식이 있나.
“정말 인성교육 열심히 시키고 있다. 우리 신조가 ‘먼저 인사하기’다. 봉사활동도 생활화하고 있고 졸업 전까지 악기 하나는 다룰 수 있게 한다. 시험도 무조건 감독 없이 치른다. 한번은 조정 동아리가 배를 사달라고 해서 영국 옥스퍼드대 조정 동아리와 울산 태화강에서 조정 경기를 꼭 여는 조건으로 3억 원짜리 배를 사줬다.”
– 요즘 국내 중공업, 화학 기업들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울산에 있으니 더 실감난다. 중공업 기업이 많이 흔들리는 건 기업 사정이 좋을 때 연구개발(R&D) 투자가 부족했던 것도 큰 원인이다. 현대중공업만 봐도 매출 대비 R&D 투자가 1.2%대다. 박사급 연구원이 300여 명 수준으로 외국 기업에 비하면 크게 못 미친다. UNIST 같은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글로벌 리더를 육성해 이런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180cm가 넘는 장신의 조 총장은 고교 시절 사관학교를 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결핵에 걸려 1년 6개월을 쉬면서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공부를 무척 잘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경상대의 전신이었던 진주농대를 갔다. 졸업 뒤 행정고시를 볼까 갈등하다 결국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조 총장은 “그때의 어려움이 내 인생을 더 잘 만들어줬다”며 “행정고시 봤으면 지금 이 나이에 이렇게 일할 수 있었겠나”라며 웃었다.
< 조무제 총장은 >
▽1968년 경상대 농화학과 졸업
▽1970년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졸업(석사)
▽1976년 미국 미주리컬럼비아대 생화학과 졸업(박사)
▽1971∼2003년 경상대 생화학과 교수
▽1990∼1999년 한국과학재단 지정 식물분자생물학 및 유전자조작연구센터 소장
▽2003∼2007년 경상대 총장
▽2007년∼현재 UNIST 총장
▽2014년∼현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김상연 동아사이언스 전문기자 dre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