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이광요 전 총리 사망을 계기로 싱가포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필자는 싱가포르에서 8년 정도 살았는데, 사람들이 평상적으로 묻는 질문의 중의 하나는 “싱가포르가 꽤 잘 사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가?”이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 꽤 오랜 시간 그 곳에 거주한 사람으로서 그럴 듯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사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 질문에 대한 체계적인 답변은 어불성설이니, 대체로 싱가포르에서 한 번쯤 대화의 소재가 되었던 것들을 기억해낸다. 싱가포르는 공무원에 대한 처우가 상당히 높아서 부정부패가 없다거나, 정부 주도의 경제관리가 효과적이고, 관료체계도 잘 운영되는 것 같다는 등등.
실제로 필자가 거주한 2006년부터 2014년 사이에도 싱가포르는 상당히 가파른 외적 성장을 기록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8년 사이 두 배 가까이 올라서 현재 명목상 국민소득은 5만 불이 넘고, 물가지수를 고려한 국민소득은 8만 불에 근접한다. 물론 2008-9년 미국발 경제 불황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도심, 부도심 가릴 것 없이 호텔, 백화점, 고급형 아파트, 지하철, 공원 등의 대형공사가 활발했다. 10여년 전에 방문했던 관광객이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변화한 도심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앞으로 10년 간 도심 항만 시설 이전과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니, 10년 뒤에 방문한다면 필자도 그 바뀐 모습에 분명히 깜짝 놀랄 것이 분명하다. 사실 그 곳에 8년 거주했다고만 해서 그 나라가 돌아가는 이치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그 나라에 대해서 주의 깊게 자료를 보거나 연구한 사람들의 식견이 높을 터이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필자가 그 곳에 살면서 가진 싱가포르에 대한 몇 가지 인상이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싱가포르의 다문화이다. 요즘은 우리 사회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다문화화 되어가고 있지만, 싱가포르의 경우 그 태생부터 여러 민족과 문화가 섞여있었다. 물론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다수의 중국계 화교를 중심의 작은 섬나라로 건국되었지만, 뿌리 깊은 말레이 문화와 함께 민족 구성에서도 말레이계, 인도계 등이 섞여있었다.
또한 원래의 중국계 화교들이 주로 중국 남부지방에서 오긴 했지만, 호키안 토초 광동 등 다양한 지방문화와 사투리가 존재했던 이질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다문화적 출발 위에 서구와의 개방경제 정책을 통해서 유입된 서구인들, 남아시아로부터 유입된 인도인들, 지난 20여년간 중국 본토에서 유입된 본토 중국인들이 합쳐져서 현재는 상당히 이질적인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구성되어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싱가포르 거주자 중 40% 가량이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다문화 조건은, 이질적인 문화와 민족 간의 갈등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지닌 잠재력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한다. 싱가포르에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진출하는 것은 정부의 기업우대 개방정책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다문화 다민족의 기본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싱가포르의 다문화 정책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것은 이중언어 정책이다. 공식 학교교육에서 중국계는 보통어 (표준중국어), 말레이계는 말레이어, 인도계는 타밀어 등 각 민족의 모국어를 배우고, 민족 간의 소통을 위한 공용어로서 영어를 배운다. 두 가지 언어를 배워야 하는 어려움이 크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잠재력은 대단하다.
예컨대, 서구 기업들이 아시아로 진출할 때 싱가포르를 교두보로 삼는 것은 이곳이 영어에 기반한, 서구인에게 불편하지 않은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고, 영어-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계, 영어-인도말을 구사하는 인도계는 떠오르는 세계시장인 중국과 인도와 거래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광요 전 총리의 회고록에 보면, 자신이 실행했던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이중언어 정책이라고 했다. 이중언어 정책의 실행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사회 갈등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싱가포르가 서구와 아시아를 가르는 개방경제로서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중언어 정책에서 빛나는 점은 영어를 공용어로 썼다는 사실 뿐 아니라, 주요 세 민족의 모국어를 보존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의 환경부 장관의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어찌 보면 중국계 같으면서도 인도 풍이 풍기는 이 사람은 소위 ‘친디아’라고 하는 중국-인도계 혼혈이다. 성장하면서 모계를 통해서 인도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부계를 통해서 중국문화를 익힌 사람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대로 중국와 인도를 넘나들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실로 다문화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잠재력이다.
김영춘 UNIST 교수·경영학부
<본 칼럼은 2015년 4월 6일 울산매일 19면에 ‘싱가포르, 다문화와 이중언어 정책’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