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의 세계에서는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참고할 때 꼭 기록을 남겨야 한다. 다른 연구자가 인용한 횟수를 기록한 ‘인용 횟수’는 해당 논문이 얼마나 좋은 연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UNIST 자연과학부에는 인용 횟수 100회를 넘긴 논문이 100편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탄소재료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로드니 루오프 특훈교수다.
UNIST 자연과학부 로드니 루오프 교수는 올해 5월, 자신의 논문 중 100편이 100회 이상 인용됐음을 뜻하는 ‘h-인덱스 100’을 돌파했다. 최근에는 113편의 논문이 인용 횟수 113을 넘겼다. 웬만한 노벨상 수상자보다 높은 수치로, 루오프 교수의 연구가 전반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한국 과학자 중에 h-인덱스 100을 넘긴 학자는 아직 없다. UNIST에서는 2013년 11월 루오프 교수를 특훈교수로 초빙했고,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산하 ‘다차원탄소재료연구단’ 단장을 맡고 있다.
대학원 1년차에 찾아온 섬광 같은 아이디어
대체 어떻게 하면 그처럼 연구를 잘 할 수 있을까.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루오프 교수는 대학원 1년차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아이디어가 갑자기 섬광처럼 떠올랐다”는 예술가스러운 답을 들려줬다.
“당시 제가 속한 연구팀은 기체 상태의 물질 속에서 세 개의 수소결합으로 이뤄진 분자 구조(삼량체·trimer)를 찾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죠. 연구팀 모두가 기체 상태만 주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고체의 결정 구조를 살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루오프 교수는 수소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인 시안화수소(HCN)에 주목했다. 시안화수소 결정은 분자들이 마치 사슬처럼 길게 수소결합으로 연결된 형태였는데, 결정 안에 여러 사슬이 평행하게 배열돼 있었다. 마침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하버드대 화학과 윌리엄 립스콤 교수팀이 엑스선 회절 분석법을 이용해 시안화수소 결정의 구조를 분석한 논문도 나와 있어 참고할 수 있었다.
“고체 결정 구조를 알고 난 뒤 마치 ‘감전된 것 같은 느낌(electric feeling)’을 받았어요. 만약 기체 상태의 시안화수소 중에 삼량체가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알 것 같더라고요. 고체 시안화수소를 분석했을 때 나오는 마이크로파 신호의 기하학적인 특징을 토대로 이량체와 전체 분자 사슬의 중간적인 특징을 가진 삼량체 신호를 추정하고 찾아내는 거죠.”
실험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루오프 교수는 대학원 1학년생 신분으로 세계 최초로 시안화수소 삼량체를 발견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세상에 없던 탄소재료 합성에 도전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루오프 교수는 성공적인 연구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삼박자’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 주제에 깊게 빠져들고, 아이디어와 연구 재료를 활발하게 공유하며,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겠다는 조바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루오프 교수는 “좋은 성과를 내는 학생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이 연구하는 문제의 답이 뭔지 정말로 궁금해 하면서 자기 연구 데이터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고 말했다.
루오프 교수가 이끄는 다차원탄소재료연구단은 이런 자세로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꿈의 재료’ 만들기에 도전하고 있다. 이론 화학자들이 컴퓨터로 계산해서 예측한 ‘초박막 다이아몬드 필름’과 ‘음의 곡률을 갖는 탄소 소재’ 등을 합성하는 것이다.
초박막 다이아몬드 필름은 두께가 원자 한 층 정도인 1nm(나노미터·10억 분의 1m)에 불과한 소재로 열을 전달하는 성질을 비롯해 광학적, 전기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의 곡률을 갖는 탄소 소재 역시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물질로, 에너지 저장 장치나 전자기기용 축전기 등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실패한 실험은 없다!
루오프 교수는 학생들과 연구팀원들에게 “실패한 실험은 없다”고 격려한다. 비록 실험 결과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더라도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실험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오프 교수는 종종 학생들에게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하루를 마칠 때는 그날 배운 것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최영준 과학동아 기자 | jxabbey@donga.com
<본 기사는 2015년 11월 ‘과학동아’에 ‘‘삼박자’ 갖춘 인재와 함께 꿈의 재료 만든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