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바닥에 깔린 초록색 인조잔디가 눈에 들어 왔다. 빨간 시계와 미니 냉장고가 시선을 사로잡는가 싶더니, 화려하고 다양한 자동차 디자인 스케치가 가득 붙은 벽면 앞으로 하늘색 셔츠에 니트 소재의 캐주얼 넥타이를 맨 정연우 교수가 나타났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제품과 기업의 시각적 가치를 높이는 산업디자인 전문가다웠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모든 교수가 가진 박사 학위가 그에겐 없다. 대신 화려한 경력이 그 공백을 메우고 넘친다. 정연우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는 영국 왕립예술대학원에서 자동차 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0여 년간 영국 벤틀리와 현대자동차에서 자동차 외장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디자인상도 여러 번 수상했다. 실무 감각이 뛰어난 현장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2014년 UNIST에 파격 임용됐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백발이 된 뒤에나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감사하게도 기회가 빨리 왔다”며 “기업에서 일하는 동안 머리가 하얗게 셌으니 물리적으론 적절한 시기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현장에서 쌓은 실무 감각 살린 연구
임용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눈에 띄는 성과가 많다. 지난해에 ‘오 스탬퍼’라는 이름의 메모 부착 도구 디자인으로 ‘2015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콘셉트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 2월에는 헤드업 디스플레이 제품 디자인으로 ‘IF 디자인 어워드 2016’에서 제품 부문 본상을 받았다. 독일의 레드닷과 IF는 미국의 IDEA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힌다.
특히 이번에 수상한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미국의 ‘2015 스파크 어워드’와 ‘2015 대한민국 굿디자인’에도 선정됐다. 우수성을 두루 인정받은 셈이다. 이 제품은 정 교수팀이 산학 프로젝트로 디자인한 ‘아프로뷰 S2’로, 속도나 경로 정보를 자동차 앞 유리가 아닌 본체 너머 도로에 보이는 것처럼 나타내는 ‘허상거리 구현방식’의 헤드업 디스플레이다.
“처음 의뢰 받을 당시 1차 제품은 도시락과 비슷한 모양이었어요. 운전대 앞 대시보드에 올려놓을 제품인데…. 설계부터 바꿨죠.”
정 교수는 제품이 모든 종류의 차에 어울릴 수 있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한편, 기능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했다.
“열이 많이 발생해서 초기 제품에는 커다란 팬이 달려 있었어요. 이걸 과감히 줄였습니다. 대신 표면을 빗살 형태로 설계했죠.”
자동차 엔진의 공랭식 냉각기나 컴퓨터 속 방열판처럼 표면적을 넓혀 발열 기능을 좋게 만든 것이다. 기술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어야겠다는 기자의 말에, 정 교수는 “기술이 반영되지 않으면 산업디자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일갈했다.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게 산업디자인의 최종 목표예요. 따라서 그 기업이 가진 기술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최선의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기업의 기술력까지 드러내는 디자인
실제로 그가 디자인 철학으로 꼽는 ‘3T’의 마지막 T가 테크놀로지다. “내일(Tomorrow), 트렌드(Trend), 그리고 테크놀로지(Technology)입니다. 지금 하는 디자인이 아무리 빨라야 내일 세상에 나온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둬야 해요. 제품이 출시되는 시점에 사회와 경제, 문화의 추세가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고려해야 하죠. 마지막으로 디자인을 통해 기업의 기술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현재 그는 철강을 생산하는 국내 중견 회사의 기업 정체성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다. 작게는 명함부터 크게는 기업의 선전 구호와 현장 매뉴얼, 프로세스를 통합적으로 손보는 작업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임직원의 기업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고 그 결과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게 목표다.
정 교수는 “산업디자인이란 물리적으로 만져지는 제품뿐만 아니라 고객을 응대 하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산업디자인의 가치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연구실 人사이드] 다양한 영감이 디자인 원천
정연우 교수는 학생들에게 영감을 많이 주기 위해 노력한다.
“학생들 재목이 정말 좋아요. 40분 세미나에서 1시간 넘게 질의응답을 하던 학생들에게 마음을 뺏겨 이 학교에 왔을 정도니까요. 다만 울산에서는 다양한 자극을 받기가 어려워서 기회만 되면 학생들과 외국에 나갑니다.”
실제로 정 교수는 학생들과 학기 중에라도 틈만 나면 프랑스, 독일 등을 방문한다. 지난해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엑스포’를 방문해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과 기술력을 관찰하고 왔다.
우아영 과학동아 기자 | wooyoo@donga.com
<본 기사는 2016년 6월 ‘과학동아’에 “보이는 모든 것의 가치를 높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