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께가 노트 한 권쯤 되는 최신형 TV를 개발할 때, 고속철도(KTX)보다 4배 빠른 미래형 고속열차를 설계할 때, 그리고 어떤 재질의 냄비든 순식간에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인덕션 전기레인지를 만들 때. 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세 기술 모두 전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전력을 제어하는 기술이 필수다.
파워인터페이스연구실을 이끄는 정지훈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전력을 제어하고 변환해 서로 다른 시스템의 전기에너지를 연결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며 “가전제품은 물론, 하이퍼루프(진공 터널에서 시속 1200km로 달리는 캡슐형 열차), 스마트그리드, 태양광단지 등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잔뜩 있다”고 말했다.
TV 얇아지면 전원 공급 장치도 작아져야
전력을 제어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부에서 교류(AC) 방식으로 들어온 전기를 가정에서는 직류(DC)방식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먼 거리에서는 전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송전탑을 따라 고전압으로 전류를 흘려보내는데, 변압기를 사용해 유연하게 전압을 바꿀 수 있는 교류가 유리하다.
반면 가전제품에 들어있는 반도체 칩은 주로 직류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 때문에 가전제품에는 교류를 직류로 바꿔주는 전원 공급 장치가 달려 있다.
문제는 최근 가전제품의 크기다. 특히 TV의 경우 얇은 두께가 대세다. 정 교수는 “전원 공급 장치를 TV크기에 맞춰 작고 가볍게 만들어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반도체처럼 집적도를 높여 크기를 줄이기가 쉽지않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전력 제어 알고리듬부터 효율적으로 다듬었다. 또 새로운 재료를 이용해 전력 반도체 스위치를 고성능으로 제작했다. 기존에 사용했던 실리콘 대신 갈륨나이트라이드(GaN)나 실리콘카바이드(SiC)로 전력 반도체 스위치를 만들어 전원 공급 장치의 동작 주파수를 높이는 고주파 스위칭 기법을 개발했다. 전력 반도체의 동작 주파수를 높이면 주기당 전압과 전류의 변화가 작아져 인덕터나 커패시터(축전기)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전원 공급 장치를 작게 만들 수 있는 셈이다.
연구팀은 LG전자와 공동으로 재질에 관계없이 데울 수 있는 인덕션 히팅 기술도 개발 중이다. 원하는 주파수에서 인덕션 전기레인지의 코일에 고전압을 흘리는 기술을 개발해 어떤 재질의 냄비도 안전하게 가열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기를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할 미래에는 전력 제어 기술이 더욱 중요하다. 정 교수는 “태양광처럼 시간에 따라 발전량이 다를 경우 블랙아웃을 방지하려면 에너지를 배터리에 미리 저장해야 한다”며 “이 때 과도한 전류로부터 배터리를 보호하고 배터리 상태를 모니터링하려면 전력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실 人사이드] “연구는 마라톤이다”
정지훈 교수의 신조는 ‘끈기’다. 대부분 한 번에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며, 반복적인 실패를 통해 올바른 방향을 찾기도 한다. 그는 연구를 마라톤에 비유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끈기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마지막 결승선을 지날 때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난 희열이 솟구친다고.
이정아 과학동아 기자 | zzunga@donga.com
<본 기사는 2017년 10월 ‘과학동아’에 “[Career] 마음먹은 대로 전기 제어하는 마법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