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입학과 중퇴, 미국 하버드대 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 종신교수, 한국인 게놈지도 완성 등 박종화 생명과학부 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는 말로도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그의 경력보다 먼저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괴짜 과학자라는 누군가의 평가였다. 영화 속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처럼 지구정복을 꿈꾸는 대신 그는 노화정복이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다.
시간을 거슬러 30년 전 고등학생 박종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던 부산출신의 소년은 컴퓨터로 노화와 관련한 생명 현상의 비밀을 풀겠다는 생각에 서울대 수의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컴퓨터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시대였다. 컴퓨터와 생물을 접목해 연구를 하는 학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서울대를 중퇴하고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을 만나게 된다.
빅데이터로 자살위험군 찾을 수 있다
30년이 지난 오늘은 생물정보학이 한국에서도 특별하거나 새삼스러운 분야가 아니다. 몇 년 전에 기자가 대학을 다닐 때도 생명정보학 개론 수업이 개설돼 있었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도 두세 명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학계에서 주목받게 된 것 치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정의가 명확하지 않았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한 일도 생물정보학을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었다.
“흔히 생물정보학을 한다고 하면 엑셀을 떠올립니다. 실험실에서 나온 여러 값들을 가지고 그래프나 표를 그리는 게 생물정보학인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치해석입니다. 생물정보학이 하는 일은 이 데이터 속에 숨은 네트워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분야와 비슷한 일을 하지만 다루는 정보는 이것보다 훨씬 큽니다.” 설명을 들었음에도 아직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그 네트워크가 어떤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박 교수는 최근에 시작한 연구를 예로 들었다. 올해 2월부터 고려대, 국군의학연구소와 함께 극단적 심리상태에 따른 자살, 자해 같은 자기 파괴적 행위를 진단할 수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자살과 같은 고도의 의사결정 행위를 유전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경로가 어림잡아 수백 가지가 넘고 여기에 관여하는 단백질과 효소는 더 많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따져들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다. 그래서 컴퓨터를 이용한다. 수많은 경로 중에서도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 다섯 개까지 좁혀 자살위험군을 조기에 찾아내는 게 그의 목표다.
늙지 않는 세상이 언제쯤 찾아올까
박 교수는 이외에도 DNA 전사 인자, 단백질의 접힘 구조 등의 다양한 생물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역시 노화다. “저는 노화연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노화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늙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연구해왔고 여기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UNIST 내에서 노화정복 상품을 개발하는 ‘제로믹스’라는 스타트업까지 창업했다. 현재까지 노화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DNA 끝단에 있는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이다. 이를 막는 텔로미어 복구 효소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노화를 막는 것이 제로믹스의 목표다. 각종 실험기술의 발달로 관련된 데이터는 충분히 쌓여있고 분석방법이 관건이다. 여기에 박 교수의 생물정보학 노하우가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새로운 기업의 CEO로써 그는 “당장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로믹스에서 수익을 낸 뒤 이것을 다시 회사에 투자하고, 이로써 건강한 사람이 많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가 회사를 설립한 진짜 이유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서야 그가 괴짜라고 불리는 이유를 조금 알게 됐다. 원래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은 주위의 시선을 끄는 법이다. 특히 그 도전이 노화 완전정복 같은, 얼핏 보기에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것이 정말 더 이상 꿈같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실험실에 3달 동안 안 나와도 된다’
박종화 교수의 실험실 문 옆에는 대한민국 헌법이 붙어 있었다. 괴짜 과학자는 자신의 실험실 운영 철학은 헌법 경영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학생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3달 동안 실험실에 나오지 않고 혼자 연구를 진행해도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연구와 토론도 자유롭다. 박 교수는 학생들에게 “교수를 믿지 말라”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교수의 말을 교리처럼 따르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케임브리지 시절에 그의 실험실은 항상 학생들이 넘쳐났다.
송준섭 과학동아 기자 | joon@donga.com
<본 기사는 2015년 7월 ‘과학동아’에 ‘늙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