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라는 이름으로 몇 명의 1학년 학생들이 배정되어 있다. 이 ‘지도학생’들은 2학년으로 진학하면서 각자의 전공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지도교수’와‘면담’을 거쳐 ‘사인’을 서류에 받아 제출하는 절차를 밟게 되어 있다.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도교수 면담이라는 단계가 학생 각자의 전공 선택과 진로에 관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심사숙고의 장치’라는 점에서 필자는 긍정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열명에 가까운 내 ‘지도학생’들이 단 한 명만 빼고 전부 ‘1초 면담’을 했다는 점이다. 그 에피소드는 이렇다. 신청 마감일에 임박해 먼저 오피스 방문 가능 시간을 묻는 메일이 온다. 나는 언제가 좋겠다는 답장을 주고 면담 약속을 잡게 된다. 필자는 나름 그들에게 ‘유의미한’ 면담을 해줄 요량으로 미리 그 학생의 프로필도 들여다보고 연구실의 탁자까지 치우고 기다렸다. 드디어 약속한 시간에 학생이 왔다. 나는 기꺼이 학생을 탁자로 안내하고 앉으라고 했지만, 학생은 머쓱해하며 서류 한 장을 불쑥 내민다. 그냥 사인만을 요구하는 학생에게 내가 더 ‘머쓱’해졌다. 처음에는 해당 학생이 너무 바쁜 나머지 앉아서 ‘지도면담’을 할 시간이 없었던 ‘특별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머지 학생들도 열심히 ‘사인’만을 받아갔고 나는 ‘사인하는 기계’가 되었을 뿐이다.
‘무슨 이 따위 형식적인 절차가 있나….’는 생각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면담은 꼭 필요한 절차다. 하지만 학생 본인 스스로가 이 절차를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학생들은 ‘면담’이 아니라 서명란의 ‘사인’만이 필요했을 것 같다. 결국 어떤 절차를 형식적인 것으로, 더욱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주범이, 아이러니하게도 학교가 아니라 학생, 제도가 아니라 사용자라는 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강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어떤 제품을 디자인할 때 디자인 방향성을 정하고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사용자의 요구점을 찾아내고 분석하는 단계가 있다. 한 학생이 사무용 의자 디자인을 진행하였는데, 의지력이 강하고 똑똑해 보였기에, 나는 한샘과 연계하여 좋은 결과물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내가 맞닥뜨린 것은 심각한 타성과 형식주의였다. 그 학생이 가져온 사용자 조사 설문지의 항목을 보자. 의자 디자인 방향성을 묻는 설문인데 의자를 구매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항목을 대체 왜 묻고 있는가? 또 그 답이 1.가격 2. 품질 3.브랜드 중 무엇이 우선하면 그 순서에 따른 특정한 스타일링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 학생은 아마도 으레 하는 형식적인 설문조사로, 습관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차피 형식적 절차니까, 의자와 관련된 아무런 설문조사 항목을 짜깁기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사용자의 디자인 취향을 파악하려는 진심에 우선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런 학생을 단호하게 야단치고 낙점을 줘서 재작업, 재수강을 지시하는 것이 올바른지, 그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핑계로 시간에 맞추어 졸업시켜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진정성의 부족이 원인이다. 어떤 것을 진짜 형식적인 것으로, 가식적인 것으로, 대충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와 신세대, 보수와 진보, 탁상행정과 실무의 탓이 아니라 진정성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세상사 살다보면 쉬운 일이 없다. 누구나 어려움에 봉착하면 적당한 타협을 생각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추악한 악마의 유혹에 빠진다. 사실은 무책임하고 나태한 그 유혹을 물리칠 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항상 딱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았다. 현대차, 벤틀리, GM 재직시절 이쯤하면 되겠지 스스로 고삐를 늦춘 프로젝트들은, 정말 밤새고 피눈물나게 노력했을 때, 나의 디자인안이 채택되고 모델로 진행되고 세상에 나왔다. 다른 디자이너나 책임자들에게도 진심과 노력은 성공의 필수요건이었다. 내가 얼마 전 참석했던 어려운 사람을 돕는 1억원을 모금하는 기부행사에서 정말 1억원이 채워지는 기적을 보았다. 나는 과연 한번 행사로 가능할까 했지만, 눈물까지 보인 모금자, 진행자의 진심과 노력이 만든 진정성에 모두가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진심과 노력이 합쳐진 것을 나는 진정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진정성도 없이, 형식적이라 탓하고, 남을 탓하지는 말자.
정연우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4년 12월 15일 경상일보 18면에 ‘진심과 노력이 합쳐진 진정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