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선업의 위기를 보며 ‘축적의 시간’을 생각한다. <축적의 시간>은 서울공대 교수들이 우리나라 주요 산업의 당면 문제에 대하여 전문적 진단을 제시한 책이다. 진단 결과는 ‘축적’이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교수들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무형의 지식과 노하우가 선진국 기술경쟁력의 결정체이며, 우리나라는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과 기술의 ‘축적의 시간’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경험을 쌓아가기 위한 ‘축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선업은 10여년 전 부터 다시 호황기를 맞았으나 금융위기 이후 공급과잉과 세계경기침체로 불황에 빠지자 조선업체들은 해양플랜트에 눈을 돌렸다. 당시 고유가로 오일메이저들이 해양 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해양플랜트는 무엇보다 건조 경험이 중요하다.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며, 이러한 기술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조선업체들은 해양플랜트 건조경험도 기술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가수주로 실적을 올렸다. 핵심기술없이 성급하게 뛰어든 해양플랜트는 결국 부메랑이 되었고, 지난해만도 국내 조선3사가 해양플랜트에서 7조원의 손실을 입었다.
조선 3사는 현재 구조조정 자구안을 내놓고 있다. 어떤 형태든지 공적자금도 투입돼야 할 것 같다. 공적자금은 결국 국민의 부담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두 차례에 걸쳐 168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바 있다. 작년 말까지 56조원(33%)의 혈세는 아직도 회수가 안됐다. 기업의 부실경영의 대가를 국민의 세금으로 메꾸는 것이다. 호황 때 이윤은 ‘사유화’되고 부실경영의 손해는 ‘사회화’되는 것이다.
해양플랜트 문제는 결국 ‘경험과 기술의 축적’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는 과거 신속한 추격자(fast follower)전략으로 단시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원천기술의 개발은 등한시했다. 해양플랜트의 핵심기술인 ‘설계 및 엔지니어링’을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했다. 우리나라는 단지 해양플랜트의 제작공장에 지나지 않았다. 핵심기술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노하우도 축적되지 않았다. 일본이 기술강국이 된 이면에는 모노즈쿠리(物作)정신이 숨어있다. ‘혼’을 들여 물건을 만드는 장인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이 기술과 경험의 ‘축적의 시간’을 만들어 왔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사무실에서 관리만 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경험을 축적해야 된다. 모두 ‘축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울산도 신성장동력을 3D프린팅, 바이오 화학, 2차전지, 동북아오일허브에서 찾고자 한다. 해양플랜트 산업의 위기를 보면서, 울산의 신성장동력도 경험과 기술이 제대로 축적돼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빠른 추격자’의 전략은 이미 한계에 달했고 이제 ‘시장 선도자’(first mover)전략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적 축적의 시간’이 없는 선도자는 또 다른 부메랑이 될 수 있다.
1970년대 시작한 조선업도 선박주문을 받고는 일본에서 설계도면을 사오면서, 자체 기술을 축적했다. 그래서 1990~2000년대에 명실공히 세계최고의 조선강국이 됐다. 해양플랜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는 이제 5년도 안됐다. 실패의 경험도 축적의 시간이다. 정주영 회장은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을 세워, 500원지폐의 거북선그림 한 장을 들고 ‘조선입국’(造船立國)을 일궈냈다. 그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말했다. 조선업이 언제 회복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지금 분명한 것은 모두 힘을 합쳐 긴 호흡으로 ‘축적의 시간’을 가지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정구열 UN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본 칼럼은 2016년 6월 15일자 경상일보 19면에 ‘[정구열칼럼]축적의 시간’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