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벨상수상자 111명과 일반시민 6000여 명이 유전자변형작물(GMO)을 반대하는 환경운동단체에 활동중단을 요구하고 4개 국어로 된 GMO지지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국제 활동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의 고준위방폐물 논의과정을 떠올린다. 현대과학의 총합체인 원자력 발전의 부산물과 GMO는 본질적으로야 차원이 다른 이슈이지만 사람들의 인식과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이다.
각 분야 노벨상을 받은 석학들까지 대거 연대해 이번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린피스에게 황금쌀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그만하라고 요청한다.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는 감정과 학설에 기반해 GMO를 반대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얼마나 많은 가난한 이들이 죽어야 이를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여길 것인가”(노벨상수상자 111명의 성명서 중).
인용한 과학자들의 성명서는 숙연하기까지 하다. 인간이 아무리 감정과 편향의 동물이라지만 얼핏 들으면 솔깃한 말에 속아 비과학이 과학으로 둔갑한 사례도 많고 잘못된 통계와 데이터를 제시하며 감정에 호소, 막연한 공포를 확산시키는 일들에 대한 통렬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 시 배출되는 고준위방폐물 역시 과학적으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선진국에서 각 분야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십 년간 연구하고 검증한 결과에 따라 영구처분을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지하연구시설 등을 통해 십 수 년 검증한 결과 핀란드 정부는 지난 연말 고준위방폐물 영구처분장 건설을 승인했지만 이런 일련의 과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사용후핵연료 관련 기술은 아직 검증이 안됐다는 식의 추정과 예단에 의한 주장이 마치 사실인양 퍼진다.
지난 7월 정부가 확정한 고준위방폐물 관리 로드맵에 따르면 영구처분장 운영 전 포화예정인 월성, 한빛, 고리원전에는 고준위방폐물 건식저장시설을 한시적으로 지어야 한다. 그런데 경주시의회와 지역시민단체는 고준위방폐물인 사용후핵연료가 “월성원전 부지 내에 노상 방치되고 있으므로 빨리 갖고 나갈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과학자 입장에서 GMO 성명을 발표한 노벨상수상자들의 심정에 공감하게 된다.
건식저장시설은 설계부터 관리운영까지 엄격한 과학적 검증과 절차 속에 운영되고 있는 최첨단 과학기술시설이다. 지상시설이라고 ‘노상방치’ 운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길 위에 버려진 쓰레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사실과 다른 용어를 쓰면서 경주시민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고준위방폐물인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이 우리 지역에 줄 수 있는 것은 없을뿐더러 결국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만 양산하고 과학정보조차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만들 뿐이다.
법도 마찬가지다. 법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제약하기도 한다. 진정 고준위방폐물을 빼 가기를 원한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현재 입법예고중인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절차에 관한 법률(안)’제정에 나서야 한다. 특별법에 중저준위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역에 고준위 관련시설을 두지 않는다고 명문화했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고준위방폐물 관리 절차법이 없기 때문에 원전운영 38년째 원전내 저장고에 보관하고, 한시적일지라도 저장시설을 늘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준위방폐물 관리절차법이 마련되고 정책이 예정대로 추진되더라도 한시적 건식저장시설을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정책철회를 주장하면서 특별법위반이라고 외치는 것은 앞뒤 맞지 않은 얘기다. 고준위방폐물 관리 절차법이 지연되면 될수록 건식저장시설을 더 지을 수밖에 없다. 앞서 소개한 GMO지지 성명서에 서명한 장미리 렌(1987년 노벨 화학상 수상) 박사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접근해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행동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준위방폐물 논란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이 여기 있다.
손동성 UNIST 기계 및 원자력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6년 9월 12일 경상일보 18면에 ‘[기고]노벨상수상자 111명의 편지와 고준위방폐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