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민 시인 월트 휘트먼은 평생「풀잎」이라는 시집 한 권만을 썼다. 1955년에 자비로 첫 시집을 출간한 이후 그는 죽는 날까지 이 시집에 실린 작품을 고쳐 쓰고 보충하여 같은 제목으로 시집을 냈다. 이렇게 시집 한 권만을 고집한 시인은 아마 미국 문학사에서 말할 것도 없고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내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라는 조금 긴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 아이가 두 손에 잔뜩 풀을 들고 시적 화자에게 다가와 “풀은 무엇인가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시적 화자 ‘나’는 “내 어찌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하고 운을 뗀 뒤 “나는 그것이 필연코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짠 내 천성의 깃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노래한다. 곧 이어 그는 “아니면, 그것은 하느님의 손수건일 것이다. 하느님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로운 기념품일 터이고, 소유자의 이름이 어느 구석에 적혀 있어, 우리가 보고서 ‘누구의 것’이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시적 화자는 “또한 나는 추측하노니 풀은 그 자체가 어린 아이, 식물에서 나온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라고 읊기도 한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본관 앞과 도서관 앞에는 직사각형의 멋진 잔디밭이 놓여 있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는 한쪽 귀퉁이를 살짝 떼어 내어 사람들이 잔디를 밟지 않고 다니도록 직선으로 오솔길을 만들어 놓았다. 테크노경영관 4층 연구실에서 잔디밭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휘트먼의 시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휘트먼은 어린아이가 손에 들고 온 풀잎을 보고 하느님의 손수건이라고 노래했지만,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푸른 잔디밭이야말로 하느님이 지나가다가 살짝 떨어뜨린 손수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옛날 서양에서는 귀부인이 남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가 지나 갈 때 일부러 손수건을 떨어뜨렸다고 하지만, 이 초록색 잔디밭도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해 하느님이 일부러 떨어뜨린 손수건과 다르지 않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잘 가꾼 잔디밭은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느낌이 문득 들기도 한다. 소나 개 같은 집짐승이 들짐승을 길들인 것이라면, 잔디밭은 황야에서 자라는 잡초를 길들인 것이 아닐까. 휘트먼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미국의 수필가이자 환경 운동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도회의 잘 다듬어진 잔디밭보다는 황무지나 황야를 무척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토록 미개척지 서부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서부가 곧 황야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산책」이라는 글에서 소로는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황야 속에 이 세계가 보존된다는 점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그는 아직 인간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황야나 황무지 속에 이 세계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문명의 이름으로 황야나 황무지를 길들이는 것은 곧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문명’의 반대말이라고 하면 흔히 ‘원시’니 ‘야만’이니 ‘야성’이니 하는 말을 떠올린다. 단순한 반대말 정도가 아니라 이항 대립적 관계를 맺고 있다시피 하다. 이항 대립적 관계에 있는 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유독 어느 한쪽에 무게가 실려 있기 마련이다. 현대인들은 ‘원시’나 ‘야만’ 또는 ‘야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나 소로는 바로 여기에 이 세계를 살리는 길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문명은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라는 뜻이 된다. 소로가 왜 그토록 서부 개척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는지 이제 알 만하다. 아무리 세련된 문명인이라고 할지라도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야성을 지닌 원시인임이 드러난다. 로마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로마를 세운 건설자로 최초의 국왕이었다. 쌍둥이 형제 레무스와 함께 그는 들판에서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라났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소로는 인간의 조상이 야만인이었다고 밝히면서 원시와 야만의 의미를 결코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초록색 잔디밭만이 하느님이 떨어뜨린 손수건이 아니라 온갖 잡초가 자라고 온갖 벌레가 우글거리는 황야나 황무지도 하느님이 떨어뜨린 향기로운 손수건이 아닐까.
김욱동문학평론가·UNIST 초빙교수
<본 칼럼은 2016년 9월 19일 울산매일신문 22면에 ‘[시론] 하느님의 손수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