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은 그 어떤 웅변이나 글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때릴 때가 있다.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에서 구호품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주민들의 사진이 바로 그러하다. 올해 4월 중순 일본 구마모토 현의 구마모토 시에서 리히터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한 이후 주변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크고 작은 지진이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2011년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규모 7.0을 넘은 지진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폐허 가운데에서도 구호품을 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는 주민들의 사진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사진 속 줄을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이 지역의 전체 주민을 보여주는 축소판과 다름 없다. 허리가 구부정한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서 대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과 청바지 차림의 중년 여성, 그리고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심지어 만삭의 몸을 하고 있는 임산부도 두 손으로 배를 만지며 서 있다. 그런데 주민들은 하나같이 질서정연하게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릴 뿐 서두르거나 새치기를 하려는 모습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엄청난 재난을 겪은 주민들의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한가롭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이 사진과 함께 뉴스는 이 재난 지역의 편의점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많이 사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생수나 라면 같은 생활필수품을 내가 많이 사가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당장 꼭 필요한 만큼만 사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편의점엔 사재기로 물건이 동나는 법이 없다. 넉넉하진 않아도 언제나 물건이 남아 있어 필요할 때면 누구든 언제나 구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과연 어떠한가? 10여 년 전 청주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생생하다. 열여덟 살 청년이 공중전화를 오래 사용한다고 핀잔을 준 여고생을 납치해 둔기로 때려 숨지게 했다. 밤 10시경 시내 공중전화 부스에서 통화를 하던 중 뒤에 있던 여고생이 전화를 오래 사용한다고 핀잔을 준 것에 격분한 나머지 그 청년은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뒤 자신의 집 근처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둔기로 마구 때려 숨지게 했던 것이다.
그보다 앞서 경기도 고양군에서는 10대 청년이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곱 달 된 어린 딸을 업고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에서 서 있던 여성은 10대 청년이 한 통화를 끝낸 뒤 두 번째 통화를 시작해 5분여 동안 길게 전화를 사용하자 통화를 좀 빨리 끝낼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가 변을 당했다. 젊은이는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항의하며 가지고 있던 칼로 여성을 마구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던 것이다.
굳이 오래 전에 뉴스를 장식한 사건 사고에서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불과 몇 년 전 열린 ‘여수 엑스포’는 온갖 새치기 방법을 ‘관람’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아쿠아리움, 스카이타워, 한국관 등 인기 있는 전시관에서는 자리 맡기를 절대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곳곳에 부착되어 있었고, 운영 요원 여러 명이 입장객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박람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 일로 운영 요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정도면 다행이고, 운영 요원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심지어 운영 요원을 폭행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영국에서는 두 사람만 보이면 먼저 줄을 선다는 말이 있다. 좁은 길거리인데도 친구 서너 명이 나란히 잡담을 하며 걸어가는 우리네 풍경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영국인이 평생 줄을 서는 데 기다리는 시간은 무려 13년이나 된다. 일생의 10분의 1 정도를 줄 서는 데 바치는 셈이다. 영국인들은 유치원 때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줄 서는 법부터 가르친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줄 서는 데 기다리는 시간은 13년은커녕 아마 1년도 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의 제2의 천성이 되다시피 한 ‘빨리빨리’ 문화는 빠른 시간 안에 눈부시게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앞만 바라보고 지나치게 서둘러 달려가는 이 문화는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우리는 입만 열면 문화강국을 부르짖고 있지만 막상 문화 민족으로서는 좀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화강국의 길은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문화강국에 이르는 길은 질서 있게 줄을 서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김욱동 문학평론가·UNIST 초빙교수
<본 칼럼은 2016년 10월 24일 울산매일신문 22면에 ‘질서의 아름다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