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산업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화학소재 및 화학물질들은 산업용 원료 및 기자재로부터 자동차 및 선박, 가전제품, 의류, 의약품 및 생활용품, 그리고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식료품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제품들에 포함돼 있다. 이러한 화학물질들은 제품의 주·부기능들을 적절히 발휘하도록 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편재(遍在)하는 화학제품들로 인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인공 화학물질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화학물질들의 광범위한 사용과 인체 노출은 화학물질 공포증, 즉 케모포비아(Chemophobia)를 탄생시켰다. 케모포비아는 인공 화학물질들에 대한 선입견 혹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막연한 불안감으로부터 오는 공포증을 말한다. 근래 몇 년 사이에 큰 사회적 이슈로 불거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케모포비아를 더욱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케모포비아의 확산과 더불어 최근에는 인공 화학물질이 들어간 제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일명 노케미족도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인공 첨가제가 들어간 식품들은 물론이고 시판되는 비누나 화장품 등의 생활용 화학제품들의 사용도 거부한다. 노케미족들은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천연 원료들로부터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일부는 의약품의 사용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나친 케모포비아는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가령 살균제 혹은 의약품의 무조건적인 사용거부는 세균의 감염이나 질병에 우리 자신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성분이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천연 재료들을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도 존재한다. 천연 재료들도 독성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며, 인공 화학재료들에 비해 쉽게 부패하거나 변질될 가능성도 높다.
또한 케모포비아가 근거 없는 불안감을 확산시킴으로써 화학산업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 파동 이후 대형마트에서 가습기 살균제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합성세재, 제습제 및 탈취제 등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케모포비아를 단순히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현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지난달까지 접수된 피해사례는 5,400여건이며 이 중 사망자는 1,124명에 이른다. 이러한 충격적인 피해규모는 케모포비아라는 여파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또한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에 관한 진실을 왜곡한 제조업체와 연구용역 수행기관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정부의 미온적이고 무책임한 대응은 화학물질의 안전성에 대한 불신을 더욱 증폭시켰다.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방지하고, 동시에 케모포비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 및 기업, 학계를 비롯한 전문가 그룹들의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관리에 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해나가야 한다. 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나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환경부는 지난해 말 화평법 개정안과 살생물제법 제정안을 입법예고 한 바 있다.
한편, 학계 및 전문가 그룹들은 인체 노출 가능성이 높은 화학물질들에 대해 미흡한 독성자료의 보완 및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 유해성 평가방법의 신뢰성 및 효율성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한다. 아울러 기업들은 환경규제를 준수하는 것이 산업을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시켜 보다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앞으로 관산학연의 유기적인 협력체계 통해 유해화학물질의 관리 방안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기를 기대한다.
이창하 UNIST 교수·도시환경공학부
<본 칼럼은 2017년 2월 13일 울산매일신문 23면에 ‘케모포비아, 막연한 불안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