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된 미국의 사회언어학자 데보라 태넌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관리자는 부하 직원의 체면을 고려해 명령하는 대신, 제안하는 형식으로 지시를 하는경향이 있다고 한다. 한 사례를 보자. 어떤 여성 상사가 남성 부하직원이 작성해서 온 보고서를 검토한 후,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고 수정을 명령하는 대신, ‘잘 했는데…이렇게 하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제안했다.
다음날 제출된 보고서를 다시 보았더니 수정한 것이 거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직원은 그것을 ‘칭찬’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만약 권위적인 관리자가 당장 고쳐오라고 소리 지르며 겁을 줬다면 더 나은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드니 씁쓸해진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소위 ‘갑질’ 리더의 명령을 받아야만 팀의 구성원이 일을 제대로 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종’의 결과일 뿐, 이해와 합의에 기반을 둔 성과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방적 명령을 받아야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단지 그 순간만 성과를 낼 (혹은 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부하 직원이 나쁜 리더의 지속적 존재에 기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나쁜 리더는 혼자 생겨나는 게 아니라, 상호 작용 속에서 성립된다. 일방적 명령을 하는 리더를 ‘모시는’ 사람도 그러한 불통에 동조한 죄가 없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 ‘좋게’ 말했을 때 제대로 못알아 듣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리더들이 소위 ‘갑질’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근 모 회사 사장이 운전 기사에게 막말을 했다거나, 모 대학 총장이 직원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다는 등의 뉴스가 들려온다. 그 뿐만 아니라 모 정치인이 공항에서 ‘노룩패스’ (No Look Pass) 로 보좌관에게 여행 가방을 밀어줬다거나, 또 모 정치인이 수해 지역에 가서 스스로 장화를 신고 벗지 않고, ‘노룩착화’ (No Look 着靴)를 했다는 뉴스도 보았다. ‘갑질’은 이제 해외에도 알려진 한국어가 됐다. ‘갑질’ 이란 한 마디로 천박한 리더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존경을 받는 리더라면 상대방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할 것이다.
필자는 의사소통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모두 ‘소통’과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막말, 폭언 등이 바로 말하기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중 특히 노룩패스에 이어 노룩착화까지 소통 문제의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소통 과정에는 언어적 행위 외에도 비언어적 행위가 포함된다. 가령,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이야기에 집중함을 표현하기 위해 시선을 보낸다거나 하는 것도 언어적 행위에 못지않게 중요한 소통 행위이다.
가령 의사소통을 하려면 상대방과 눈을 마주쳐야 한다. 노룩패스는 스포츠에서 상대방에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상대방을 쳐다 보지 않는 전략을 칭한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 자기 맘에 안드는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노룩’은 단순히 상대방을 단순히 ‘아랫것’이라고 무시한 경우이다. 노룩패스와 노룩착화의 공통점이 수행원이나 직원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데 정작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 도움을 주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도와주는 수행원이나 직원을 사람이 아니라 기능성 도구로 간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통은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리더는 특권의 남용을 하지 말아야 존경을 얻고, 동의에 기반을 두어야 진정한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내가 그 보다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건 명령과 복종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과가 아니라, 상호 존중 속 소통을 통한 성과야말로 그 조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최진숙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8월 2일 울산매일신문 16면에 ‘[시론 칼럼] ‘노룩(No Look)’은 소통이 아니다’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