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케네스 톰킨스 베이브리지는 “Now we’re all sons of bitches. 이제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이다.” 라고 중얼거렸다. 모두를 개새끼로 만든 그 일은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반에 일어났다.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시 근처의, 맨하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삼위일체)”라고 명한 사막부지에서였다. 힌두교 경전을 즐겼던 오펜하이머의 취향으로 미루어 볼 때, 트리니티는 창조자 브라마 (Brahma), 보존자 비쉬누(Vishnu), 파괴자 시바(Shiva)였다.
재래식 폭약과 기폭 장치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케이블로 둘러 쌓인,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직경을 가진 쇠구슬의 프랑켄슈타인적인 기묘함은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의 초조함의 결과였다. 새벽은 여명을 맞아 낮이 되었고, 불덩어리는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붉은 색으로 바뀌었고,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자주색 구름이 떠올랐다. 인류 최초 핵실험 성공을 확인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과학자들은 춤을 추고 악수를 나누고 웃어대기 시작했지만 실험 물리 부서장인 로버트 윌슨은 의기소침했다. 왜 그러냐는 리차드 파인만의 물음에, 그는 “우리가 만든 저 무시무시한 물건 때문에”라고 답했다.
군대는 원자폭탄의 목표물을 고르고 있었고, 놀라운 과학적 성과의 흥분에 젖은 과학자들 중 적어도 몇몇은 트리니티 핵실험의 취기를 걷어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4분 트리니티 핵실험에 사용된 쇠구슬과는 다른 종류의, 채 시험해 보지 않은, 우라늄 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장 오펜하이머는 정부에 보내는 최종보고서에서 두가지 우려를 전달했다. “미국이 핵무기의 주도권을 장악하리라는 확신이 없다. 미국을 핵무기의 끔찍한 파괴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당시 ‘라이프’지는 오펜하이머와 그의 과학자들을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로 칭송했지만, 오펜하이머는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접두사 프로(Pro)는 먼저, 앞서라는 뜻으로,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보는/생각하는 자’이다. 그는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화가 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산에 묶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내린다. 간은 재생되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계속 받게 된다. 또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나중에 보는/생각하는 자)에게 판도라를 보내 ‘상자’를 열게 해 인간들이 불행을 겪도록 한다.
불을 주었으나, 그 부정적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펜하이머는 ‘프로메테우스’라기 보다는 ‘에피메테우스’이다. 과학적 호기심과 나찌의 비인간적 지배로부터 인류를 지키려는 정의감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으나, 핵무기의 통제할 수 없는 시바적 파괴력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핵의 평화적 사용이란 말로 원자력 발전을 칭송하기에는 원자력은 파괴자 시바적 본질이 강하다. 자연의 힘은 제어가 가능할 때만 인류에게 의미가 있다. 원전 찬성론자들은 우리가 시바를 제어해 보존자 비쉬누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고는 예측 불가능하며, 단 한번의 사고가 일으킬 비가역성은 그 스케일이 장엄하다.
탈핵 반대론자 혹은 원전 찬성론자들의 주요한 기치를 열거해보면, 원자력은 싸다, 수출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등으로 정리 된다. 탈핵론자들은 핵 폐기물 처리 및 해체 비용을 포함하면 비싸다, 수출해도 매출만 있을 뿐 이익은 없다 등으로 답변한다. 생존의 문제가 오늘 내일의 삶을 유지하려는 자본주의적 경제 프레임에 묶였다.
우리는 세 번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추억, 쓰리마일 섬, 체르노빌, 후쿠시마를 가지고도 우리의 간이 재생되리라 생각한다. 원전 전문가들께 바라건데, 프로메테우스가 되시라. 에피메데우스가 되어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다행히 ‘희망’이었다고 후세에 전할 일이 아니다.
송현곤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10월 16일 울산매일 23면에 ‘[시론 칼럼]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그리고 판도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