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 발표됐던 필자의 연구실과 어떤 기업의 연구프로젝트가 매체와 방송으로 보도된뒤 많은 연락을 받았는데, 늘 반복되는 한종류의 질문이 있다. “디자인전공교수님께서 구조나 배치에 관한 아이디어도 내십니까?”다. “네, 형태와 구조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디자인이니까요”라는 대답 뒤 되돌아 오는 질문은 “아 저는 디자인전공은 디자인만하는줄 알았는데, 공학같은 영역도 같이 하시는군요, 참 신기합니다. 디자인하시는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합니까?”다. 필자는 “당연하지요, 디자인은 장식이나 포장이 아닙니다”는 대답으로 끝맺는다. 답답한 여운이 늘 남는다. 디자인이 무엇이고 또 ‘공학같은’은 무엇이람.
21세기가 20년이 다된 지금도 사람들은 디자인을 무언가 예쁘게 다듬고 포장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인식의 경향은 학력이나 나이, 성별도 무관하다. 중고교 학생부터 대학교수까지 디자인을 장식이나 포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쯤와서 그 인식의 잘잘못을 묻거나 계몽캠페인이라도 벌이자는 글은 아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때 찾는 지푸라기 중 하나가 적어도 ‘용한무당집’보다는 ‘디자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글이다.
산업디자인은 200여년전 영국산 방직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계가 생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식무늬패턴을 연구하고 적용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형태를 시각화하는 ‘미술작업’이기 때문에 산업디자인을 당연히 미술영역의 연장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패턴’을 기계가 생산할 수 있게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패턴을 만든 아이디어’에 있다. 그 아이디어가 ‘산업디자인’이다.
지난 10여년동안 자동차기업의 디자이너였던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어도 되겠다. 자동차기업의 연구조직에는 수많은 전문부서들이 있다. 설계만해도 충돌안전부터 구동, 패키지 등 수십가지가 넘고 의심할 여지없이 각 부서 엔지니어들은 최고전문가다. 하지만 타 부서 영역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즉 차량 도어손잡이 설계담당자는 세계최고의 손잡이 설계자일지언정 헤드램프법규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크기와 각도를 모른다. 충돌안전설계담당자는 별 5개 실력자라도 라디에이터의 필요면적을 알리 만무하다. 시트설계담당자는 공기저항을 적게 받는 형상기술을, 조향장치엔지니어는 법규를 충족하는 창문의 높이를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이너는 다 안다. 각부문 설계안을 전부디자인에서 조율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안을 구현하기 위해 충돌기준을 범퍼형상에 반영하고, 담당자와 함께 헤드램프크기와 위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연비를 높이기 위해 공력담당자와 논의하면서 엔진성능확보에 필요한 라디에이터그릴공간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업무관련도가 낮은 엔지니어들은 서로 잘 모른다. 하지만 차량전체를 관장하는 까닭에 디자이너는 차량개발프로젝트에서 대부분 동네북이요, 마당발이다. 자동차연구소에서 모르긴 몰라도 디자이너가 가장 넓고 가장 얕은 지식의 소유자다. 심지어 연료탱크의 용량과 철판두께도 꿰어야한다. 생산라인의 공정수까지 안다.
우스갯소리로 자동차연구소에서 디자이너가 없으면 차가 못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엔지니어들의 안을 종합하면 서로 충돌해 도저히 3차원형상과 구조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란다. 충돌을 해결하고 결국 차가 되도록 만드는 창의융합자의 역할을 디자인이 맡아온것 임을 조용히 깨닫게 하는 말이다. 이렇듯 요즘 한창인 융합은 이미 디자인이 하던 본래의 역할이었다.
비단 자동차 영역만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낸 아이디어로 죽던 회사를 살리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새 사업영역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잘나가는 기업과 사람은 하나같이 융합자로서의 디자인을 십분활용한다. 늘 시작부터 디자인이 관여하고 융합자의 역할을 도맡는다. 그런 조직의 디자인 책임자는 사장급이다. 거꾸로 디자인이 제일 시급한 기업이나 기관, 사람은 다들 ‘우리가 디자인에 투자할 시간이나 역량이 없어서’라는 안타까운 표현을 한다.
이 지면을 빌어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제발! 이미 다 만들어 놓고 예쁜 껍데기 씌워달라고 찾아오지 마세요. 맨처음 시작할때 찾으시면 기적이 생겨요!”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니까요!”
정연우 UNIST 교수 디자인·공학융합전문대학원
<본 칼럼은 2017년 10월 24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융합자 -디자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