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1882-1941)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한 강연을 묶은 에세이집 ‘자신만의 방’에서는 거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에세이 속 화자는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의뢰 받아 옥스브릿지의 도서관에서 여성에 관한 기술을 찾는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많은 관심이다. 여성에게 영혼이 있는가. 여성은 왜 남성보다 열등한가. 여성은 왜 털이 적은가 등. 그러나 곧 그녀는 남성의 관심이 여성이라는 사회적 존재를 탐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오히려, 남성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거울을 사용했다고 결론짓는다. 이 거울은 남성의 힘과 영향력을 두 배로 키워주는 효과가 있어, 남성은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며 문명의 발전과 전쟁의 승리를 얻어나갔다는 주장이다.
그 거울 속 남성의 힘이 실제로 두 배나 커지는가에 관한 질문은 차치하고, 정말 거울이 필요했었나 하고 물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당시의 남성이 사회전반의 영역에서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면 왜 그런 거울이 필요했던 것인가 하고 말이다. 울프의 오해라는 말이 나올 듯싶다. 그러나 이것을 남자 개인이 아닌 사회전체의 구조로 놓고 보면 울프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거울은 셰익스피어 뺨치는 재능을 가진 여성 작가 지망생이 있다 하더라도, 여성 전체는 열등하기에 그녀의 능력을 현실화할 남자와 같은 사회화 과정은 필요 없다는 논리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거울이, 그렇게 얻은 남성의 힘과 지위를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문화계, 문학계, 정계, 교육계에서 연이어 쏟아져 나온 미투(#me too)의 개별 에피소드 속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그 구조가 아닐까. 여성들을 사회에서 그간 침묵시켜왔던 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는 문학 그리고 과학을 통해서 여성을 소외시켰던 남성의 역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100여년 전 김동인은 ‘한심한’ 남성들을 위해 에세이를 발표했다. ‘영혼: 여자운동의 봄’(1921)이란 글을 통해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해 반항함이 창조력의 근원이고 그것이 영혼인데 여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창조 대신 모방이 있어 짐승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렇기에 참정권을 주면 안 된다고 피력한다. 서구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부화뇌동하는 한국 남자들이 한심하다는 투다.
여성 소외의 담론에서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20세기 초 자본주의 사회로 급격하게 진입하던 시기, 늘어가던 여성범죄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을 사용했다. 노조에 아츠요시는 ‘여성과 범죄’(1930)라는 책에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체내기관 때문에 호르몬의 영향에 민감하고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우울증, 히스테리, 성적 방종 등이 나타나고 남성보다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감정을 조절치 못하고 사치를 부리며 가정을 뒤로 한 채 외간남자와 어울리는 부인을 일본에서는 ‘독부’(毒婦)라며 경계했다. 여기엔 부인의 성적 방종보다는 급속하게 발전하던 자본주의 속에서 갑작스레 소비의 주체로 등장한 여성에 대한 남성 사회의 단속이 내포돼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여성 소외의 수사는 과거의 유물이고 현재진행형은 아니지 않는가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은 듯싶다. 소위 ‘펜스 룰(Pence rule)’을 보자. 미국의 부통령 마이클 펜스는 아내 이외의 여성과는 저녁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언뜻 보면 청교도적인 이 언설은, 여성과의 접촉은 잠재적으로 남성에게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그 접촉을 원천 차단한다는 의미에서 예방의학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남성은 보호해야 할 숙주, 여성은 바이러스다.
미투 운동이 앞으로 어떤 전개를 맞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결국 나와 성(性)이 다른 사회적 존재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존중에는, 그간 여성을 소외시켰던 구조와 역사를 이해함이 선행돼야 한다.
이재연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8년 4월 9일 울산매일신문 19면에 ‘[시론 칼럼] 미투 운동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