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아파트는 60-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도입된 콘크리트 건축물을 말한다. 빠른 인구증가와 산업화에 따른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을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주거방식이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해 도시는 상업지구, 공장, 베드타운 등으로 구획됐고, 아파트는 베드타운 지역에서, 대량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거주할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현대식 아파트의 모체를 만든 사람은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1887-1965)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 이후 아파트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중산층이 아파트 단지를 떠나고 주로 이민자 출신의 하층민이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빠르게 주변화 됐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아파트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압축적 경제성장의 거주모델이자, 건축산업을 떠받친 하나의 축이 됐다. 그리고 값비싼 강남의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 됐다. 이렇게 근대와 전근대를 분명하게 가르는 한국의 공동주거 형태를, 한 프랑스 지리학자는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 아파트 공화국에 30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옮겼을 때의 황홀했던 느낌은 잊을 수 없다. 아침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보일러에 연탄을 갈러 가지 않아도 좋았고, 눈이 왔을 때 빙판길을 막기 위해 대문 앞에 연탄재를 뿌리지 않아도 됐다. 아파트 이사 후 무엇보다 청결한 주변 환경이 맘에 들었다. 거기에 고층에서 바라보던 전망은 기대하지 않았던 덤이었다. 여러 상점이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도 좋았다. 고기 심부름과 두부 심부름 따로 하지 않아도 됐고, 학용품을 사러 학교 앞까지 갈 수고를 덜었다. 아파트 상가는 항상 빵 굽는 냄새와 함께 했다. 갓 구운, 종이처럼 잘 찢어지던 빵을 잼에 발라 먹으면서 왠지 생활이 업그레이드된 느낌도 들었다. 밥 대신 빵을 먹는 아침은 맞벌이하시던 어머니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은 무조건 빵이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살면서 한 번도 ‘내 동네’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셀 수 없이 많이 이사를 많이 다녔고 옆집도 이사가 잦았고, 몇 년 이상 얼굴 본 옆집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머리가 커지면서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이웃과 거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릴 때 놀았던 골목길을 향수했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에서 다방구, 짬뽕을 하고 연식공과 플라스틱 배트로 옆집 친구와 야구를 하던 그 골목이 그리웠다. 단독주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로망과 자식과 그런 기억을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함께 일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아파트에 공동체가 있음을 느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6월 13일, 지방자치 단체장을 뽑는 투표날이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이용하는 아파트의 작은 야외수영장 옆에서 아파트 자치회가 자그마한 대회 하나를 열었다. 야외수영장에 송어를 풀고 아이들이 손으로 잡는 대회를 열었다. 사회는 매일 아파트 앞에서 등굣길 지도를 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맡았다. 노인정 할아버지들이 야외에서 고기를 굽고, 아파트 부녀회 어머니들이 식사와 반찬을 나눠주었다. 관리실에서는 주변정리 맡았다. 딸아이의 친구들을 만나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을 만나 안부를 묻고 고생하신다는 덕담을 나눴다. 요리조리 도망가는 송어를 잡기위해 텀벙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햇살이 번졌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어른들의 미소가 바비큐 연기 사이로 보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아먹기만 한 내 손이 덩그러니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이곳을 위해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다.
아파트에도 사람 사는 공동체가 왜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사람들의 자발성을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없는 것처럼 살아온 것은 아닐까. 처음으로, 단독주택의 기억을 아파트 안에서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재연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8년 6월 26일 울산매일신문 18면에 ‘[사는이야기 칼럼] 아파트 공화국? 아파트 공동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