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작품 중에 ‘파피용’(2006)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어로 ‘나비’라는 뜻의 파피용은 소설에 등장하는 우주선의 이름이다. 태양풍을 받기 위해 거대한 돛을 펼친 우주선의 모습이 나비와 비슷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우주선은 지구인 14만 4,000명을 태우고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난다. 인류의 공해가 만든 재해가 자연의 복원력을 넘었다는 판단,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비관론에 입각해 지구를 버리고 떠나는 여행이다.
그간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같은 스파이물에서 지구를 멸망시키는 주요한 소재는 핵무기였다. 지구를 위협하는 핵무기는 70-80년대 냉전체제 하 미국-소련의 강대강 군비증강 경쟁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냉전 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오히려 통제가 어렵게 된 핵개발 (구소련 국가와 이란, 파키스탄, 최근 북한의 핵실험 등)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 여름을 지내며 그러한 강력한 한 방(?) 없이도 인류가 멸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에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장기간 지속된 폭염 때문이다. 에어콘 리모콘과 선풍기 스위치를 번갈아가며 밤새 덜 더운 곳을 찾아 침대 위아래를 기어 다니다 보면, 햇볕이 따가워서 방아쇠를 당겼다는 ‘이방인’(1942)의 주인공 뫼르소가 나인지, 내가 뫼르소인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아침엔 더운 기가 빠지지 않아 온몸이 축축 늘어진다.
싱가포르를 GDP 6만불이 넘는 부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초대총리 리콴유(1923-2015)는 경제성장의 공을 에어콘(그리고 다문화)에 돌렸다고 한다. 한 달 넘는 열대야와 누진적 전기세와 밤새 씨름하다 보면, 에어컨은 복지를 넘어 실존의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뉴스는, 인간이 배출하는 CO2가 이미 임계치를 넘어 기후조약이 계획한대로 단계적 감축을 하더라도 예전의 시원했던 지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을 내놓았다. 이 폭염의 끝이 향하는 곳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 전반부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물이 부족해서 버석거리는 흙. 농작물 생산을 늘리기 위해 사투하는 농부. 항시적인 먼지폭풍. 폐병. 그렇지만 이 영화에는 이글이글 타들어가는 땅의 반대편,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아 해안도시가 사라지는 묘사는 들어있지 않다.
‘파피용’적 상상은 현실이 될 전망이다. 네덜란드 벤처기업은 2027년 화성거주를 목표로 실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소설처럼 미래의 화성 거주민은 편도 티켓만 들고 탑승하게 된다.
만약 지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면 파피용에 승선하겠습니까? 당신은, 최초의 인류가 되고 싶습니까, 최후의 인류로 남고 싶습니까? 그런 가혹한 선택을 후대에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재연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8년 8월 17일 울산매일신문 19면에 ‘[사는 이야기 칼럼] 폭염과 나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