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생님들이 모인 사석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대학의 주인, 특히 국공립대학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이 주제였다. 나는 등록금을 내는 주체이자 대학이라는 교육서비스의 목표인 학생을 마음 속에 떠올렸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은 생각이 달랐다. 대학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교육 및 연구에 참여하는 구성원 모두는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고, 나그네의 할 일은 이 공공재가 후대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보살피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인이 없음으로 우리 모두가 주인이고 또 우리의 후세가 주인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듣고 ‘공공’이라는 의미에 관해 더 생각해 보게 됐다. 그간 내게 있어 공공이란 것은 공공장소에 볼 수 있는 흔한 풍경과 같은 것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며 뛸 준비를 하는 그런 풍경. 또 지하주차장이 있는 건물 옆 차로변, 사람들이 대놓은 차 사이에 자리를 잡고 주차하는 풍경. 혹은 곧 ‘만원’불이 들어올 것 같은 승강기 안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발과 같은 풍경들. 이러한 풍경들에 비춰봤을 때 공공장소는 너도 나도 아직 주인이 아닌 곳이니 선점하고 선취해 나에게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빈자리를 위해 뛰는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의 슬픈 역사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박완서의 소설 ‘엄마의 말뚝’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처럼,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포화 온몸으로 살아낸 어머니들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대학을 보내는 억척스러움과 닮아있다. 잰걸음으로 뛰어야 했던 건 그 시대의 생존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점의 대상으로서의 공공영역이나 공공재가 아쉬운 것은, 그것이 넓은 의미의 공동체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개념에는 저기에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팔을 뻗을 때 밀쳐지는 옆 사람의 기분이나, 좁은 2차로에 양편으로 주차된 차를 피해 중앙선을 넘어가야 하는 운전자나, 나 하나가 들어옴으로써 불편해질 엘리베이터 속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지 않다.
요즘 급등하는 아파트 가격을 보면 더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돈이 있어서 아파트를 사는 데 무슨 참견이냐고 화를 낼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맞는 말이지만 근시안적이다.
우선, 아파트에 자금이 집중되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물건을 생산하고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데에 쓰여야 할 지금이 아파트에 집중됨으로써 그만큼 경제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 아파트 값이 뜀으로써,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경제활동을 시작할 우리의 아들, 딸들의 미래가 불행해지게 된다.
최근 정부는 토지 공개념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제재의 칼을 꺼내들었다. 여기에 담긴 철학은, 땅이라는 것은 한정된 자원이므로 후대를 위해 아끼고 나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므로 먼저 가져야 한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 ‘공공’에 대한 인식이 미래지향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해본다.
이재연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8년 10월 2일 울산매일신문 19면에 ‘[시론 칼럼] 내 것도 아닌, 네 것도 아닌’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