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의지대로 태어나진 않지만 세상에 나와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카톡에 그렇게 많이 저장돼 있는 이름과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페이스북 알림 속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쉽게 친구가 되지만 바쁜 일상 속 헤어짐보다는 잊힘을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최근 학교를 방문해 세계문학에 관해 멋진 강연을 한 어느 선생님은 우리나라처럼 ‘효율적’으로 장례를 치르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영면을 맞으며 가까운 병원 지하에 위치한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떠나보낸다. 3일장을 치르면서도 고인에 대한 애도를 말이나 글로 전하는 의식이 없다. 그저 사람들은 향을 올리고 유족들과 인사하고 부의금을 전하고 앉아서 식사를 하다 나온다. 그것은 그나마 고인을 잘 아는 경우다. 어설프게 아는 경우는 동료에게 부의금을 전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후 몇 십 년 사이 고인이 살았던 집과 터(보통 아파트)는 재개발이나 새로운 도시계획으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우리가 예전부터 그렇게 ‘효율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몇 해 전 아내 쪽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내와 내가 결혼을 서두를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할머니로, 꾸부정한 허리를 이끌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올라오셔서 결혼식 내내 웃으시며 “축하한다, 잘 살라”는 덕담을 해준 분이다. 그 할머니의 장례식에, 먼 곳에서 온 문중 어르신은 제문을 읽어주셨다. 국어교과서에서 배웠던 바로 “유세차~”로 시작하는 그런 글이다. 시조창을 하듯이 유려하게 길게 뽑은 가락 속에 할머니의 처녀시절과 그리고 식민지 시기와 전란 중에 고생하셨던 가족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할머니와 가족으로 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에게도 제문 속 할머니의 인생이 촉촉하게 스며들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학부의 노 교수님과 헤어짐을 경험했다. 죽음이라는 헤어짐은 아니지만, 이제 그 분의 자취를 교내에서 볼 수 없기에 비슷한 느낌이다. 몸이 편찮아 석좌교수직을 일찍 내려놓은 그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짐 정리를 하러 온 날, 학부를 위해 써달라며 적지 않은 장학금을 쾌척했다.
“학교로부터 받은 게 참 많았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좀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 유명한 노 교수님에 관해 내가 너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죄송했다. 우리는 사는 내내 가볍게 만나서 ‘효율적’으로 헤어진다. 그 흔한 효율성은 천박함의 다른 이름이란 것을, 그 분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재연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8년 11월 9일 울산매일신문 18면에 ‘[사는 이야기] 사람과 헤어지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