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정월대보름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 운수를 보고, 난날·난시를 들어 사주팔자를 찾는다. 필자가 명리학에 아무 지식이 없어 단정할 수 없지만, 운수나 사주팔자를 풀어내는 과정을 보며 이것은 거의 통계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난 사람은 어떤 기운을 갖고,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긴 사람은 어떤 성격을 갖는다는 사주와 관상 풀이는 수천년 사례가 쌓인 ‘빅데이터’를 분석한 통계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의 오늘은 기록유산이다. 인류문명은 기록과 전수를 통한 지식축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음식에는 이런 술이 어울리고, 저런 장소에는 저런 음악이 어울리고, 그런 패션에는 그런 공간이 알맞다는 공식·양식은 많은 경험과 관찰로 쌓은 빅데이터를 분석한 통계다. 음악, 미술, 건축, 디자인, 패션, 음식, 문학 등이 트렌드라 불리는 양식의 틀에 담겨 구분되고,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증거다. 의학과 과학, 공학도 수많은 실험반복으로 축적한 데이터 분석과 통계로 근거가 제시되고 이론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문명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예외 없이 빅데이터 분석과 통계를 거쳐 검증되었기에 우리는 트렌드를 따르고 이론을 신뢰한다. 그리고 하드웨어적 요소 외에, 사회 운용에 해당하는 법, 규범, 예의, 관습이라 이름 붙인 소프트웨어적 요소 또한 인류사에 걸친 데이터 축적과 분석, 통계에 기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스템은 시간이 갈수록 빅데이터 축적, 분석과 통계가 고도화, 안정화된다. 만약 신과 같은 절대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효율적이며 관리가 용이한 시스템 아닌가?
그러나 룰은 깨지라고 있는 법. 이 시간, 이 장소에 태어나 이렇게 살게 된다는 사주풀이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고, 천생연분의 인연으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는 궁합과 달리 이혼으로 귀결되는 부부도 있다. 철저한 수요예측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했는데 망하고, 통계상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 의외로 대박을 치는 경우가 있다. 빅데이터 분석과 통계가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분석 실수나 어떤 통계치를 간과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작은 오류문제가 아니다. 전혀 듣지 않는 예외가 있고, 때로 그런 예외들이 기존 시스템을 뒤엎는 혁신, 혁명이라는 점이다.
혁신과 혁명은 대부분 기존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된다. 디자인 혁신은 기존의 방법론이나 디자인적 사고, 트렌드와 전혀 다른 접근을 통해 탄생된다. 전통을 부정하고 새 표현과 해석으로 등장한 것이 현대미술, 현대음악이다. 과학, 공학의 새 연구도 기존의 체계와 결과물의 단순 계승을 부정해야 시작된다. 이처럼 분야를 막론하고 혁신과 혁명은 기존의 틀을 따르지 않는, 요즈음 말로 ‘아싸’(아웃사이더) 혹은 ‘샹마이웨이’(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의식이 강한 사람의 행동방식)적 사유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늘날 표준조명인 LED는 1879년부터 사용해온 필라멘트 전구를 부정했다. 전구 속 가스 종류와 필라멘트에 따라 밝기 성능을 개선시켜온 기술 축적은 LED에 전혀 쓰이지 않는다. 과거 브라운관 TV의 전자총방식이 요즘 평면 TV로 계승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숫자버튼 휴대전화가 하루아침에 스마트폰으로 바뀐 것은 잡다한 부가기능 위주의 당시 휴대전화 트렌드를 무시하고, 초소형 컴퓨터에 전화기능을 넣은 아이폰을 개발한 애플의 공이다. 100년 넘은 자동차 내연기관 엔진기술이 전기차 모터나 배터리에는 1도 쓰이지 않는다. 모던과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아예 개념이 다르다. 근대미술과 현대미술, 클래식음악과 현대음악, 무용, 문학심지어 패션과 머리모양도 마찬가지다. 즉 데이터와 통계의 전수를 거부하고, 직접 느끼고 경험한 통찰을 적용하는 데서부터 혁신과 혁명이 시작되지 않았나?
우리가 혁신이나 혁명을 원한다면 조금 삐딱한 DNA가 필요하다. 관습에 무턱대고 순응하지 말고 “왜?” “왜 따라야 하는데?” “왜 그대로 해야 하는데?”라는 자의식 말이다. 데이터와 통계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는 통찰력과 우주최강 추진력은 기본탑재.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혁신이나 혁명가가 아니라 그냥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투덜이 스머프’일 뿐이니까. 삶은 데이터로 통계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며 겪는 것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9년 2월 22일 경상일보 18면 ‘[경상시론]통계 vs 직경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