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버닝썬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얼핏 사소해 보였던 폭행시비가 유착관계 의심으로 번지더니 누가 마약을 투약했네, 성접대 정황이 있네어쩌네를 거쳐 연예인의 불법촬영 동영상 유포문제로 확대되었다. 심지어 다른 과거 사건과 연계를 넘어 배후의 어떤 정치-경제계 세력의 존재의혹에까지 이르렀다.
매일 갱신되는 뉴스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낸다. 누구는 연예인 개인의 일탈에 실망하고 누구는 유명인들의 도덕적 타락이 분하다 한다. 누구는 연예계 전체의 비리라 치를 떨고, 누구는 오랜 젠더의 폭압적이고 반복적인 악행을 또 보니 속이 뒤집어진단다. 그런가 하면 케이팝산업의 위기가 될라 덮고 넘어가자는 어처구니 없는 의견도 언론에 공연하다.
이토록 버라이어티한 혼란은 개별사건을 콘텐츠로, 연계-확대를 프레임으로 치환하면 쉽게 이해된다. 즉 콘텐츠도 프레임도 모두 타당하다. 다만 우리가 직시할 것은, 유명인 개인에 대한 법적·사회적 단죄뿐만 아니라 정화작용을 통해 개선시킬 우리사회의 의식이라는 프레임이다. 나무도 중요하지만, 궁극의 목적은 숲을 조성하여 득을 얻는 것이다.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선언이행,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대북제제, 종전선언, 북미회담, 남북회담 등은 모두 콘텐츠이고 나무다. 궁극의 목적인 평화가 프레임이고 숲이다. 나무를 돌보는 가지치기, 비료주기, 물주기의 올바름 따지기는 중요하다. 그래도 숲을 만들어 푸르름을 즐기는 것에 마침표가 있음을 잊지 말자.
미래 모빌리티의 핫이슈로, 전기차와 수소연료전지차 사이의 공방이 한창이다. 누가 미래의 주류 교통수단이 되냐는 논쟁은 친환경성의 우위확보에 기준한다. 전기차는 화석연료가 아닌 전기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친환경 이동수단이라 하고, 수소연료전지차는 우주에 존재하는 거의 무한한 수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친환경 이동수단이라 한다.
두 진영의 주장은 급기야 상호비방으로 증폭되었다. 전기차 진영은 수소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친환경적인 요소, 화석연료를 태워 부생수소를 얻을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와 유해물질을 지적한다. 또 전기분해로 수소를 만드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수소 화학반응을 통한 전기 생산량 보다 더 큰 비효율을 문제 삼는다. 수소저장, 사용인프라의 안정성, 고비용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반대로 수소연료전지차 진영은 현재 전기에너지 생산의 상당량이 화력발전에서 나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전기차가 브레이크나 타이어마모 분진 등 미세먼지를 더 많이 발생시킨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대체 어느 쪽이 더 친환경이고 어느 편이 미래이동수단으로 대세냐는 질문을 받는 일은 필자의 일상이 되었다. 다 나무고 숲이다. 누가 더 친환경적이냐를 따지는 것은 나무 가꾸기나 들여다 보기다. 즉 콘텐츠다.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숲, 프레임은 화석연료와 내연기관차의 시대가 끝나고 ‘전기에너지와 전기차의 시대로 전환’이라는 팩트다. 수소연료전지차도 수소발전기를 장착한 일종의 전기차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풍력, 수력, 태양광과 일부 원자력 등 지속사용 가능한 발전원으로 친환경성을 높이고, 반대쪽에서는 수소생산효율을 높이는 공학-기술경쟁은 우리가 즐기면 되는 관전포인트라는 나무, 콘텐츠다. 프레임은 전기에너지와 친환경 이동수단의 혁신이다. 간단하다.
나무와 숲, 콘텐츠와 프레임으로 문제를 푸는 개념은 디자인과 유사하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아야 하는 것, 콘텐츠도 중요하고 프레임도 중요하다는 속성이 판박이다. 제품이 예쁘고, 옷이 아름답고, 자동차가 멋지기만 하면 안된다. 제품의 쓰임새가 좋고 옷 착용자에게 어울리고, 운전자에게 즐겁고 편해야 굿디자인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늘 핑크빛 세상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성향이 달라 다투고, 늘 기대와 실망으로 널뛰기하니 마음 상하기 일쑤다. 그러나 나무 가꾸듯 부단히 노력하고 이해하고 품으며 만드는 하루하루의 축적이 결국 핑크빛 숲을 만드는 사랑의 프레임 아닌가? 나무 없는 숲 없고, 나무만 돌보면 숲이 안된다. 콘텐츠와 프레임을 같이 보는 디자인처럼 우리 삶은 나무를 돌보고 숲을 만드는 여행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9년 3월 26일 경상일보 18면 ‘[경상시론]나무도 보고 숲도 본다-콘텐츠와 프레임의 미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