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과기원을 졸업한 정신과의사로서 학생들의 정신적 어려움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2016년 유니스트에 왔습니다. 진료와 더불어 인간을 직접 돕는 새로운 기술들을 정신의학에 적용하고자 인간공학과에서 연구합니다.
저는 지난 4월11일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인 ‘보고 듣고 말하기’의 강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지난해 12월31일 자신의 병원에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고 임세원 교수님이 이 프로그램의 주요 개발자입니다.
우울증과 자살 전문가인 임 교수님은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직장의 문화를 개선하여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자신이 기업정신건강연구소를 통해 얻은 노하우를 기꺼이 다른 의사들과 나누고자 하셨고 그 결과 2016년 기업정신건강연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필자는 이곳에서 처음 임 교수님을 뵈었고 그 경험을 대학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초기부터 자살예방교육에 대한 정보도 받았지만 2~3시간의 프로그램을 과기원처럼 바쁜 곳에서 시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2년 전에도 강사양성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실제로 운영하기 힘들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안전교육, 폭력예방교육 등의 법정의무교육이 있는데 이 교육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동안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몇몇 의과대학 교육과정에는 이 ‘보고 듣고 말하기’ 프로그램이 포함되었습니다. 정신과가 이미 기본과목이지만 문제를 푸는 것과 직접 다루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잘 치료받던 환자가 갑자기 치료를 거부할 때 우울과 자살의 문제가 아닌지 의사로서 잘 ‘보고’, 공감적 질문을 통해 잘 ‘듣고’, 전문가를 만나도록 잘 ‘말하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년 말 성균관대는 의과대학을 넘어 모든 단과대에서 이 예방교육을 시행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임 교수님의 소속대학입니다. 실제 시행을 위해 제가 받은 강사양성교육 시간에 성균관대에서 많은 분이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의료인이 주로 교육을 받던 심폐소생술이 비의료인에게도 전파되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 것 같습니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니까요.
저도 용기를 내어 유니스트에서 예방교육을 시행하고자 합니다. 적은 숫자라도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총장님께서 맨 앞자리에서 역할극의 배역을 맡아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빡빡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포함하지 못한다면 따로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교수님들을 먼저 생각한 이유는 팀의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선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회사로 치면 실무자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인 과장급입니다. 직원들의 스트레스에는 사장님보다 과장님이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이제 막 업계에 적응하는 사람에게 리더가 보여주는 모습은 큰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교수님들이 아마 이 시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울과 자살은 뇌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합니다. 발목을 접질려 아프고 부어오르면 머리로 판단해서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프린터에 토너가 부족하면 컴퓨터 화면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주지만, CPU가 망가지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주변에서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 뇌는 조금씩 변하는 것들은 잘 알아채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매일 조금씩 자라는 자녀의 변화는 잘 모르지만, 오랜만에 만난 조카의 변화는 쉽게 느낍니다.
우울하거나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일에서 실수를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짜증과 화가 늘어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한숨 쉬며 술을 많이 마시고 근무시간에 조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요즘 왜 저러지?’라는 생각이 들면 잘 묻고 ‘듣기’를 해야 합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고 해가 길어지고 에너지가 증가하면 역설적으로 자살이 증가합니다. 조직의 리더로서, 가정의 부모로서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정두영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헬스케어센터장
<본 칼럼은 2019년 4월 15일 경상일보 18면 ‘[경상시론]대학 진료실에서, 학부모님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