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은 다양한 반찬을 특징으로 한번에 한상이 차려진다. 그래서 음식들을 먹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반면, 양식은 주로 코스요리라 단품이 하나씩 차례차례 제공돼 먹는 데 비교적 시간이 좀 걸린다. 한식은 비빔밥처럼 한번에 다양한 것을 동시에 경험하는 잔치 같은 느낌이고, 양식은 하나의 음식 맛을 하나씩 하나씩 느껴야 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인터넷 검색을 위해 한국의 포털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한식의 반찬들처럼 다양한 정보와 형형색색의 배너들이 넘쳐난다. 반면, 구글의 검색창은 한국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너무 심플하게 검색어 입력창만 덩그러니 있다. 한식처럼 다양한 것들이 한번에 눈앞에 펼쳐져야 우리는 만족하고, 외국의 그들에겐 중요한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편한 모양이다. 사용자 성격과 제품경험의 관련성을 조사한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문화가 한식의 그런 형형색색의 다양함을 선호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국 사람들은 그러하지 않다. 사용자의 다섯가지 성격요소들(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친화성, 신경성)을 측정 했는데 미국이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성격요소들에서 개인 간의 다양한 차이가 관찰됐다. 하지만 한국인 피실험자들은 각 척도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아 한국인 샘플을 포기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
사회심리학자 호프스테더에 따르면 한국인은 강한 집단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한국인들의 집단주의가 그런 구성원의 개성에 있어서도 균질함을 만들어낸 것 같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집단 속에서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개개인의 행복이 아닌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전히 그런 집단주의의 병폐가 사회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이슈로 등장했던 ‘과잠’, 특정 아웃도어브랜드 패딩이 학생들의 교복화됐고, 등산복은 중년 아줌마 아저씨들의 드레스코드화 된지 오래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회식은 모두가 참석해야하는 자리다. 여전히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프로젝트 결과물들 중에 튀는 것이 없다. 그리고 최근 제주도 난민 이슈부터 다문화가정과 외국노동자에 대해 여전히 차가운 시선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대다수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도 드러난다. 심지어 서울을 가나 지방을 가나 아파트 면적, 아파트 구조와 인테리어까지 천편일률적으로 같다. 집단주의를 통해 결국 늘어나는 것은 창의성이 아닌 눈치(흥미롭게도 눈치는 한국문화의 대표로서 영영사전에도 검색하면 나온다)뿐인 것 같다. 또한 끼리끼리 뭉치는 집단을 형성해 학연과 지연, 혈연 등 인맥사회를 만드는 데는 젊은 세대라고해서 특별히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양성을 통해 관용을 배운다. 프랑스가 똘레랑스를 가진 것 또한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접경지 혹은 변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획일화된 균질 사회에서 개개인은 평균화되고 평균의 잣대로 사사로운 것에도 경쟁과 시기 그리고 질투가 난무한다.
미학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장면이 아름답게 인식되는 것은 균질성 속에서의 다양성이 나타날 때라고 한다. 결국 다양성이 결여된 균질 집단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다. 한 사회에서 다양성이란 결국 개개인의 그리고 한 소수집단의 의사, 감정, 취향이 무시되지 않고 존중되고 사회정책에 반영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식문화와 같이 다양성에 대한 선호가 있는 집단이다. 다만, 편식을 하지 말고 다양한 음식들을 밥상에 올려 그 다양성을 음미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본 칼럼은 2019년 5월 24일 울산매일신문 18면 ‘[매일시론] 미학적 사회’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