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공돌이였던 나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아내 덕분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러갈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상의 음악은 연주자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듣는 라이브가 최고라고 느껴왔다. 음악 녹음, 저장, 그리고 재생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엔 그런 호사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됐다. 음악을 들으면 영혼을 청소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라이브 효과가 대단했던 것 같다. 소수에게만 국한됐던 그 경험들은 에디슨이 19세기 말 세계 최초로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됐다. 21세기 초 MP3가 등장한 이후 이젠 더 이상 LP와 CD를 사지 않게 됐다. 연인과의 여행 전날이면 소리바다에서 최신 음악들을 다운 받아 USB에 정리하던 기억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됐다. 이제는 그런 수고로움 없이 원하는 음악을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스마트폰을 통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이 이젠 한달에 몇천원만 내면 편리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음악의 보편화가 이뤄졌다. 인간의 궁극적 경험이 음악, 미술, 무용 같은 예술을 통한 즐거움인 점을 고려할 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러한 예술적 경험의 대중화는 언제나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음악 경험의 변천사를 돌이켜보면, 과거 공유의 대상이었던 음악은 오늘날 사유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 기술이 부재하던 시절 음악은 함께 듣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이어폰을 끼고 혼자서 듣고 즐기는 사유화가 대세다. 이어폰의 사용은 그 음악에 대해 몰입적 경험을 제공하지만 사람들의 대화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등 존재하는 공간과의 격리를 야기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을 탐닉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탐닉을 얻는 대신 주변, 그리고 타자와는 분리되고 고립된다. 나아가 그런 음악 사유경험은 LP, 카세트테이프, CD가 제공하던 물리적·감성적 경험 없이 대부분 스마트폰이라는 실체가 없는 허상의 공간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와 더불어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허상 그룹에 사회적 소속감을 위해 빨리, 쉽게 그리고 편리하게 가입하고 소속돼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과의 무의식적 비교를 통해 존재 이유를 찾으려 한다. 남과 비교하면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진다는 말이 있는데도 말이다.
흥미롭게도 공동체적 결속 경험을 의미하는 영단어들을 보면 ‘Ship’이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예를 들면, Friendship, Membership, Kinship들의 단어를 보면 끝이 ship으로 끝나는데, 지인의 말을 빌리면 ship은 글자 그대로 ‘배’를 의미하고 그 집단의 구성원간에 물리적 왕래와 교류가 있어야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친구간에 배가 왔다갔다해야 우정(Friendship)이 되고, 멤버간에 배가 왔다갔다해야 멤버쉽(Membership)을 느낀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허상의 세계에서 여러 서비스나 카페나 그룹에 소속돼 그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배가 왔다갔다 하고 있는지?
개인화되면서 사람들과의 물리적 정신적 상호작용이 줄어들고 점점 허상의 공간에서 실체 없는 사회적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개인화와 허상사회의 대중화는 우리 개개인의 공유와 공감을 저해하고 감성적 그리고 연대감 결핍을 야기해서 급기야 잦은 멜랑꼴리를 선물하고 있으며, 이는 많은 경우 일상의 우울로 이어지는 듯하다.
제품 애착 이론에 따르면 쉽게 얻고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애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고와 노력이 결핍된 편리한 생활은 애착결핍을 낳고, 그 결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가 가벼워지고 무료해진다. 그래서 계속 우울해진다.
우울모드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기술이 가져다준 편리함에서 벗어나 사람, 사물들을 시간을 내 직접 만나고 경험하는 그런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김차중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9년 7월 29일 울산매일신문 15면 ‘[매일시론] 편리 그리고 우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