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상호는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이제는 한국 제품이면 누구나 믿고 쓰는 제품이 되었다.
우선 이런 성장을 이룬 앞선 세대에 감사한 일이자, 참으로 자랑스러운 발전임에 분명하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본다. 이런 발전과 자랑스러움을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여기에 더해서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향곡선을 그리는 제조산업 분야에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혁신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적용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며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전에 사고와 문화의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창조적 사고, 대화와 협의 즉 관료형 수직적 보고 형태가 아닌 수평적 보고, 대립적이 아닌 긍정적 건설적 대화 방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우리가 아는 많은 부분이 기계로 대치되며 삶의 패턴이 바뀔 것이다. 이로 인해 미래의 일자리와 생계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새로운 기회가 도처에 널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회는 인간 중심적 기계 활용법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인간은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주안점을 두었고, 기계는 사고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기계가 편하도록 맞춰주며 살아왔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기계가 어디를 갈지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므로 인간에게는 불편하지만, 기계를 다루는 운전법을 배워서 핸들을 돌리고 브레이크를 밟고 조종을 한다. 컴퓨터도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인다. 타이프라이터에서, 컴퓨터 자판기, 마우스로 점차 인간이 편리한 방향으로 진전하고 있다. 이제는 점차 진화해서 음성 인식이나 노트패드에 손 글씨까지 가능해졌다. 정리해보면 지금까지는 기계가 쉽게 일하도록 인간이 기계에 맞춰 살았다. 이제 기계의 지능화, 즉 인공지능으로 인해 기계가 더 똑똑해졌다. 이전에는 손으로 기계를 조작하고 프로그램으로 기계에 명령하던 일들이 이제는 말로 간단히 명령하거나, 더 나아가서 기계 스스로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 스포츠 신문 기사의 대부분을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가 대신 작성할 수 있으며 통역도 척척 해준다. 미래의 컴퓨터에는 자판기가 필요없을 수도 있다.
앞으로의 기회는 기계의 관점에서 인간의 스킬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기계를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이 창조적 파괴이고 또 기계적 사고, 수직적 사고에서 벗어나 수평적 사고와 대화를 해야하는 이유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대학시절 전공과목보다 캘리그래피(멋글씨)에 관심을 가졌던 덕분에 마침내 매킨토시와 아이폰의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잡스의 경우처럼, 창조적 파괴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이에 맞게 기계를 만들 때가 됐다.
인간 중심의 사고와 인문학이 녹아든 분야에는 무궁무진한 새로운 비즈니스 창출과 일자리 기회가 있다. 오래전에는 꽤 괜찮은 직업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까마득히 잊힌 직업이 꽤 있다. 하지만 그런 직업이 없어졌다고 해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지는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은 융합과 플랫폼의 시대이다. 자신의 업무, 자신의 직업·직군, 자신의 가치사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통해 최대한의 이익과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의미다. 유명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하지만 미래 예측의 첩경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고 했다.
그렇다. 우리의 사고와 창의력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이기주의적 투쟁이나 이념적 편향주의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인문학과 기술이 협력하듯 상반되어보이는 두 집단이 창조적 파괴를 실천하는 융합적 협의체가 되어야 한다. 밝은 미래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김동섭 UNIST 교수·경영공학부 학부장·4차산업혁신연구소장
<본 칼럼은 2019년 7월 29일 국제신문 26면 ‘[과학에세이]4차 산업혁명시대 기술과 인문학’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