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하이패스는 이제 대중적인 전자 요금징수 시스템으로 정착한 듯하다. 이 전자 요금징수 시스템은 2차 대전 때 적과 아군의 식별을 위해 개발되었다가 1986년 노르웨이에서 인건비 절감을 위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되었고,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들이 이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전자 요금징수 시스템의 이름은 각 나라마다 다른데 그 작명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색을 잘 반영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실용주의가 대세인 미국에서는 운전자들의 사용 편의성을 강조해 이지패스(eZ-pass), 프랑스는 시민혁명의 나라답게 자유(Liber)를 강조해 리버티(Liber-T), 그리고 짧지만 깊은 뜻을 담고 싶어 하는 일본은 시스템의 이니셜을 따서 이티씨(ETC)로 돼있다.
그런데 한국은 왜 하이패스(hi-pass)일까? 아마도 새로운 기술에 대한 반가움으로 안녕을 뜻하는 하이(Hi) 그리고 빠르다는 의미의 하이(High)가 담겨있는 듯하다.
하이패스의 이름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한국은 신기술 수용도가 높고, 속도가 생존을 위해 중요한 국가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맥락 속에서 ‘빨리빨리’주의는 그 어떠한 패러다임들보다 한국전쟁 이후 국가재건에 강력하게 작용해왔다. 자동차, 조선, 토목 분야가 한국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단기간에 최신 기술들을 싸게 공급하는 그런 ‘빨리빨리’주의가 세계시장에서 먹혔던 것이고, 산업화 이후에도 여전히 단시간에 최대한의 효율은 사회 전반에서 실력의 지표가 되고 있다.
‘빨리빨리’ 이데올로기에서 생산 활동을 해오던 사람들에게 일상에서의 여유는 호사와 같았다. 계속되는 야근(심지어 학생들은 야간자율학습)과 잔업이 일상이었고 그러한 패턴 속에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 없는 일상에서도 끼니를 거를 수는 없으니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아마도 가장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인 (또한 창의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스파나 사우나에서 뜨끈한 탕에 들어가 땀을 내며 스트레스를 푸는 대신, 매운 음식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유산(?)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매운 맛에 열광하는 레드홀릭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유학시절 한국의 떡볶이를 요리해 프랑스와 네덜란드 친구에게 대접한 적이 있는데, 모두들 처음에 한 꼬치 집어 먹더니 이내 콜라를 마시고는 더는 못 먹겠다고 미안해하며 젓가락을 놓던 추억이 있다.
매운 맛은 아주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우리를 재생시켜주는 듯 보이지만 생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뇌에 쾌락을 담당하는 영역이 고통을 담당하는 영역과 많이 겹쳐 있어 매운 맛이 고통이지만 쾌락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런 찰나의 자극은 사용자경험 디자인에서 순간의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불행히도 순간의 경험은 일시적인 감정으로서 우리의 행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매운 맛의 일시적인 경험의 반복은 더 강한 매운 맛을 좇게 되고 결국엔 매운 맛에 점점 무뎌진다. 매운 맛의 연속된 탐닉은 행복으로 이어지기보다 마약처럼 왜곡된 일시적 행복감을 줄 뿐이다. 통증을 통해 순간순간의 쾌락과 탐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곳에서 그 구성원들의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매운 맛을 즐기는 우리의 행위는 매 순간의 통증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나중에 한번에 해소하려는 우울한 탈출구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스트레스와의 계속된 공생을 부정할 수 없다면 매운 맛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다른 다양한 방법들이 사회적으로 제공되면 좋겠다.
김차중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20년 1월 22일 울산매일신문 19면 ‘[매일시론] 하이패스와 레드홀릭’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