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에서는 거지노파로 변장한 요정을 홀대한 왕자가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된다. 흉측한 야수는 결국 한 여인의 진실된 마음을 얻어 본래의 미남왕자로 되돌아온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쁘다는 교훈으로 알려져 있다. 맞다. 마음의 눈이 중요하다. 외모, 외형적인 것, 즉 비주얼(Visual)은 가치판단의 주재료가 될 수 없다는 명제다.
그러나 현상은 정반대다. 사람은 누구나 깨끗한 것,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찾는다. 예쁜 카페에서 사진을 찍고, 집을 예쁘게 장식할 수 있는 소품을 산다. 모두의 핸드폰 사진갤러리 속 이미지들은 적어도 각자가 예쁘다며 저장해놔야겠다고 여긴 대상들이다. 지저분하거나 정돈되지 않은 공간이나 사물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비주얼의 기능은 강력하다.
비주얼에 관한 인간본성이자 세상규범이 하나 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산업디자인 명제다. 자연이든 인공이든 세상 만물의 모양새는 각각의 기능이 시각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먼저 자연을 보자. 맹수의 이빨은 한번 물리면 죽겠구나 싶은 공포감을 본능적으로 일으키는 비주얼이다. 쌈채소의 넓은 초록잎은 엽록소를 부피 대비 햇빛을 많이 받아들이는 최대 면적 구조로 진화한 식물의 기관이다. 매끈하게 생긴 제비는 날쌘 느낌 그대로 지구상에서 제일 빠른 시속 200㎞짜리 생명체다.
인간 문명도 마찬가지다. 위세를 드러내는 전투방식을 썼던 근대 유럽제국 병정의 화려한 군복이나 우스꽝스럽게(?) 위로 치솟은 모자는 적보다 위력적이고 키 커 보이려는 비주얼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현대 전투복은 거꾸로 적에게 잘 보이지 않게 형태와 무늬를 만든다. 경찰 제복은 공권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법관의 복식은 법제도의 근엄을 디자인한 시각물이다. 스포츠 종목마다 다른 운동복은 제각각 기능 수행에 최적화한 생김새다. 의사, 약사의 하얀 가운도 신뢰와 권위의 비주얼적 표현이다. 유니폼, 머리띠, 조끼, 깃발 등은 단합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기업이나 집단의 시각 표현물이다. 누구나 직장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이 다르고, 주중주말 옷차림과 신발이 다르다. 스포츠카들이 하나같이 미끈하고 납작한 스타일인 이유는 빠르게 달리는 기능의 시각화다. 소형차의 귀염성은 그만큼 젊고 예쁜 사용자를 반영한 시각화다. 덩치 큰 SUV의 생김새는 여가활동에 필요한 적재기능을 표현하는 시각물이다.
이처럼 지구 모든 존재가 비주얼이라는 강력한 기호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네 뭐네 하며, 그 기호의 역할과 의미를 애써 폄하하고 축소하려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물욕을 경계하던 옛 문인들조차 명필이라 칭하며 아름다운 글씨를 숭상하지 않았나?
입사 면접에서,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에서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단정한 옷차림은 당연하다. 의사 가운이 지저분하고 차림새가 제멋대로면 어떤 환자가 진료를 받겠나? 왜 예술가나 디자이너들의 외모는 어딘가 특이한가? 남들과 똑같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왜 전형적인 연구자의 모습하면, 검정 뿔테안경을 쓴 수염 덥수룩한 얼굴부터 떠오르는가? 유행은 둘째치고 거울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의 비주얼코드이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사기꾼은 비주얼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사기꾼이다. 누군가 믿을 만 해서(비주얼) 투자했는데, 일을 줬는데, 잠적이나 배신(기능)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미녀와 야수’ 속 왕자가 저주받는 진짜 이유는 거지꼴 요정을 몰라봐서가 아니라, 인간적 예의를 지키지 않아서다. ‘미녀와 야수’의 진짜 교훈은 모든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것이지 외양이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비주얼이라는 기능은 더 강조돼야 마땅하다. 심지어 요정조차 거지꼴로 변장해서 왕자가 저주에 걸려들도록 속임수를 쓰지 않았나. 이것이 비주얼의 위력이다. 우리가 잘 다루어 쓸 세상 최고의 무기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20년 2월 18일 경상일보 19면 ‘[정연우칼럼]비주얼의 위력’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